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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52) - 대한뉴스 속 베를린 장벽

dolf 2025. 10. 16. 13:11

쓸 게 없으면 튀어 나오는 대한뉴스 이야기, 오늘은 좀 가벼운(?) 주제를 다뤄볼까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이야기도 아닌 더 이상 없는 나라, 동독 이야기입니다. 예. 동독하면 나오는 대표 주제인 '베를린 장벽'을 가볍게 다뤄볼까 합니다. 사실 이 블로그의 대한뉴스 이야기만 잘 보셔도 대한민국 현대사, 그리고 세계사 시험에 도움 되는 이야기가 꽤 나온답니다.^^

 


 

 

사실 이 뉴스는 1961년 10월 이야기인데, 베를린 장벽이 쌓인 것은 이 해 8월 13일입니다. 그런데 10월에 이 내용이 나온건 베를린 장벽이 일간 가벽으로 대충 쌓인게 8월 13일이고 이후 보강을 수 개월동안 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중인 상황의 뉴스인 셈입니다. 이 점을 미리 적고...

 

혹시 여기서 베를린 장벽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시는 분은 안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정말 그런 분이 계시면 먼저 이 노래를 소개해 드립니다. '피아노 맨' 빌리 조엘의 'We Didn't Start The Fire'입니다. 미국 젊은이들의 현대사 의식의 창렬함에 기겁해서 만든, 빌보드 핫 100 1위 곡입니다. 정작 본인은 지금은 안 좋아하는 곡이라 합니다만.

 

 

베를린 장벽을 가기 전에 일단 2차 세계대전 끝으로 가 봅니다. 콧수염 개자식, 아돌프 히틀러가 퓌러붕커에서 자살하며 유럽의 2차 세계대전은 끝납니다. 하지만 연합국들은 독일을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실 히틀러를 만든 그 뒷배경에는 1차세계대전 이후 처리를 정말 개판으로 한 기존 세력(협상국)들의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히틀러를 뽑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독일 그 자체였으니 어찌 하겠는지요? 1945년 6월부터 1949년 5월/10월까지 독일은 연합국 4개국(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의 군정 통치를 받습니다. 1948년까지 역시 미국/소련의 군정 통치를 받은 우리나라와 상황은 비슷한데, 다만 여기는 4개국 통치라 좀 복잡했습니다.

 

사실 독일 및 게르만 민족 국가들(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을 쪼개야 한다는 점은 연합국 내에서 어느 정도는 공통된 사항이었습니다. 그 방향에 대해 좀 이견은 있었습니다만 일단 독일을 한 나라로 둬서는 안 된다는 점은 전부 일치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쪼개졌고 오스트리아는 영구중립을 선언하며 겨우 유지를 했는데, 독일에서도 승전국에 대해 사실상 배상으로 넘어간 지역(옛 프로이센)을 제외한 나머지를 어떻게 쪼갤지가 문제였습니다. 일단 이 지역을 저 네 나라가 나눠서 군정 통치를 했는데, 뭐 그거야 있을 수 있지만 문제는 수도인 베를린이었습니다. 베를린은 이 독일의 상당한 동쪽에 있는데, 소련의 군정 지역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상징성이 있는 이 곳을 소련만 통치하게 둘 수는 없어서 베를린도 다시 네 나라가 갈라서 군정 통치를 했습니다. 이게 문제의 시작입니다.

육로를 막았더니 항공만으로 베를린을 먹여 살리는 미쿡의 기상

 

본격적인 냉전의 기미가 보이자 서유럽을 방어할 탱커로 독일이 지목되었고, 독일을 어떻게든 살릴 필요가 생기자 1949년 5월에 소련을 제외한 3개국 군정 지역이 독일에 통치권을 반환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이 건국됩니다. 이에 반발해 소련이 베를린의 3개국 군정 지역(서독 행정 지역이 아닙니다), 즉 서베를린에 대한 육상 통행을 막는데 이게 그 유명한 '베를린 봉쇄' 되겠습니다.(사실 진짜 원인은 소련의 마르크 화폐 절하에 따른 서방측의 화폐개혁에 따른 반발입니다.) 또 다른 콧수염 개자식, 즉 이오시프 스탈린은 서베를린에 대한 물류를 막으면 서방이 굴복할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서방은 정면대응을 선언했고, 특히 미국은 당시 유럽 미 공군 사령관인 '석기시대 애호가' 커티스 르메이가 주도한 '전 세계의 C-54 조종사들에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 한 마디의 무제한 공중 수송으로 맞불을 놓습니다. 이런 물량 작전에 스탈린도 기겁해 결국 베를린 봉쇄는 풀립니다. 그렇지만 이 베를린은 유럽 냉전의 한복판이자 1세계와 2세계 간첩들이 벌이는 정보전의 전장으로 자리잡고 베를린 봉쇄는 그 가운데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일단 시간이 흘러 1953년에 강철의 콧수염이 급사하고, 권력 투쟁 끝에 소련의 명언 메이커로 군림하게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합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며 상대적으로 조금 더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독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동독과 서독이 세워진 이후 정말 동서독 국경은 휴전선만큼은 아니더라도 철저히 갈라져 이 국경을 넘어 서로 넘어가는 것은 어렵게 되었고, 특수한 환경인 베를린만 동서베를린에 검문소 등 경계는 세웠으나 국경만큼은 철저히 감시를 하지는 않아 사실상 유일한 양국의 탈출(?) 통로가 되었습니다. 흐루쇼프는 베를린의 검문을 조금 약하게 하면 서베를린을 통해 발전하는 동베를린을 동경해 서독인들이 동독으로 많이 넘어올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루트를 통해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많이 탈출을 했습니다. 동서독 건국 전까지만 해도 수백만, 동서독이 세워져 국경이 잠긴 이후에도 이 베를린 루트로 수십만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서베를린은 동독 땅 한 가운데에 있어 육상으로는 탈동민(?)의 서독 본로의 이동을 차단할 수 있지만, 연합국 3국이 항공사가 운영하는 항공망은 막을 수 없다보니 서베를린으로 넘어간 동독인들이 항공기로 서독으로 망명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망명한 동독인이 250여만명에 이르는데, 안 그래도 인구가 적은 동독에서 수백만 단위의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국가 유지가 어려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흐루쇼프도 기겁을 했고 동독에서는 당장이라도 대책을 세울 것을 읍소했으나, 일단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대응을 염려해 + 소련이 체제 경쟁에서 졌다고 비쳐질까봐 바로 동서베를린 경계를 막는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풋사과 시절 존 F. 케네디 사진입니다(태평양 전쟁 시절)

 

그러다 미국 대통령으로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는데, 흐루쇼프는 젊은 케네디를 처음부터 얕잡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것이 그 전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 역시 같은 시기에 전장에서 구른(흐루쇼프는 정치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보통 정치장교 이미지와 다르게 개념있는 정훈장교로 평가받았습니다.) 흐루쇼프조차 레벨 차이가 나서 함부로 할 수 없었는데 케네디는 태평양전쟁 참전자지만 위관급이라 당시 장군이었던 흐루쇼프와 비교하면 풋사과라 생각해도 될 정도죠. 

 

흐루쇼프는 이러한 탈동 러시에 '베를린에서 4개국 모두 철수해 자유도시로 만들자'는 제안을 했지만 서방측에서는 이 제안이 베를린을 통째로 소련(동독)이 먹겠다는 술책으로 판단해 거부했고, 케네디가 집권하자 최후 통첩 형식으로 다시 이 제안을 했으나 역시 거부됩니다. 이걸로 일단 명분을 쌓았다 생각한 흐루쇼프는 동독측에서 계속 베를린에 장벽을 쌓자는 요구를 해왔기에 이를 실행할 때가 되었다 판단했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며 기세가 오른 중공의 마오쩌둥이 흐루쇼프를 수정주의 운운하면서 태클을 거는 것에 자신을 얕잡아 본다 생각하여 센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있어 베를린 장벽 건설을 결심합니다.

 

1960년도 안에 달로 간다고 폼나게 연설을 해도 소련에 정치적으로 밀린 건 어디 안 갔습니다

 

베를린 장벽 직전인 1961년 6월에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케네디는 만렙은 아니더라도 98렙은 되는 흐루쇼프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흐루쇼프는 '케네디 저 자식 호구 맞음'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 확신을 가진 뒤에 앞에서 적은 베를린에서 4개국군 철수를 최후 통첩으로 날렸고 예상대로 거부를 당하자 명분도 쌓았겠다, 허약한 케네디가 큰 반응을 보이지 않겠다는 확신도 얻었겠다 베를린 장벽 건설 최종 실행에 나섭니다. 실제로 이는 케네디의 잘못이 맞았는데 이 해 4월에 정보 당국의 말만 믿고 쿠바 피그만 침공을 승인했다 개망신만 당했고, 그것을 만회하겠다고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소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노회한 흐루쇼프에게 말린 것입니다. 

 

미소 정상회담 이후 베를린에서는 장벽 설치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일단 소련과 동독에서는 겉으로는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어야 할 미국은 오히려 방관했는데,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케네디는 흐루쇼프가 핵전쟁을 일으킬거라는 걱정을 했고 '겨우'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하는 것을 걱정할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소문은 점차 퍼졌지만 미국은 '전쟁 대신 장벽이면 그나마 나은거지'하며 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961년 8월 13일이 되었고, 동독은 전격적으로 동서베를린 경계에 병력을 배치하고 철조망을 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때 동독군에는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려는 자는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시작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소문대로 설치에 들어가자 미국은 겉으로는 무언가 행동하려는 것 처럼 보였으나 확전 방지를 이유로 전투기를 통한 무력 시위 이상을 하지 않았고 케네디는 이후에 무력하다는 비난을 국내외에서 들어야 했습니다. 흐루쇼프가 케네디를 호구로 본 것은 그 다음해 10월 쿠바 미사일 사태가 벌어질 때 까지 이어집니다. 그 사이 1년은 전 세계에서 핵전쟁 위험이 가장 높았을 때입니다.

 

그 안쪽은 대충 이렇게 생겼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처음에는 그냥 철조망만 쳐 있었고 이게 벽돌 벽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꾸준히 강화되어 최종적으로는 서베를린 경계(정확히는 거기에서 동쪽으로 조금 들어간 자리. 그 이유는 벽 보수 작업 등의 이유로 서베를린을 침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에는 철근 콘크리트 벽이, 동베를린 안쪽으로는 100m 내외의 폭으로 휴전선 못지 않은 전기철조망-지뢰지대-바리케이드-참호가 설치되고 실탄을 소지한 병력이 꾸준히 감시 및 순찰을 돌게 됩니다. 가장 위의 대한뉴스가 이 과정에서 동서베를린 경계에 있던 동독측 주택을 강제로 부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 설치 후 1호 탈동자

 

사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이 업그레이드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쳐진 이후에도 탈동 시도가 계속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 총동원되고 그 때마다 업그레이드가 된 결과가 저렇습니다.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 최초의 탈동 시도는 바로 베를린 장벽을 경비하던 동독 국경수비대 대원이었습니다. 이 때는 그냥 철조망만 넘어서 그야말로 1초 탈동. 이후 벽돌로 벽을 쌓았더니 벽이 얇은 것을 노려서 차로 벽뚫고퓨쳐(?)를 시전해서 탈동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일부 지역은 건물은 동베를린, 도로는 서베를린으로 나뉘는 곳도 있어서 그냥 동독 건물에서 도로로 뛰어내리는 탈동법이 나타나 주변 건물을 싹 철거했습니다. 이랬더니 아예 땅굴을 파서 탈동을 하는 일이 벌어지자 지하까지 조사하고 중간에 참호를 파 땅굴을 파면 쉽게 발견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을 업그레이드했으나 기발한 탈출 시도는 계속되었습니다. 동서 베를린을 오가는 물류 차량에 숨어서 넘어가는 것은 정말 정석적이고, 차량을 샅샅이 수색하니 아예 검문소 돌파용 차량을 만들어 넘어가는 사례도 나왔습니다. 동독군이나 소련군 군인 코스프레를 하여 검문을 통과한 경우, 아예 소련 군용기로 위장 도색해 넘어간 경우 등 창의적인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그렇지만 창의성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었는데, 베를린 장벽을 넘다 사살당한 사람만 백여명 이상이며, 국경에서 사살당한 사람까지 합하면 천여명 단위가 됩니다. 탈동에 실패하여 체포된 사람은 6만여명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은 베를린 장벽을 넘다 철조망-지뢰지대 사이에서 사살당했는데, 이 사람이 총상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그 상황이 서독측에 그대로 노출되어 비난이 일기도 했습니다. 이후 동독측은 '사살당한 사람은 즉시 베를린 장벽 바깥으로 이동시킨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북한에서 평양 주변에 배치된 사람을 제외하면 그 다음 성분이 좋은 사람만 휴전선 부근에 배치한다고 하듯이 동독 역시 동베를린 국경경비대에는 검증된 정예병만 배치했습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수십년간 자리잡습니다. 하지만 그 최후는 번개처럼 세운 것처럼 번개처럼(?)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허무하게 말입니다.

 

때는 1989년. 당시 소련은 소련-아프간 전쟁 패배에 따른 후유증, 그리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따른 막대한 비용 부담에 더해 1980년대 중반부터 원유 가격 폭락에 따른 외화 부족으로 경제난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앞길이 급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내부적으로는 개혁/개방 정책을 취함과 동시에 동유럽 공산 국가에 대한 불간섭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동유럽에서는 민주화 바람이 불었는데, 동독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동독의 독재자 에리히 호네커 정권의 비밀 경찰에 의한 철권 통치에 대한 불만이 있는대로 쌓인 상황에서 개혁을 거부하는 동독을 소련이 외면하자 결국 호네커 정권은 막을 내리며 혼란은 더욱 심해집니다.

 

준비되지 않은 기자회견이 부른 나비효과

 

새로운 동독 공산당 정권은 일단 민심을 잡기 위해 동서독 국경을 통한 통행 제한 해제 등 여행 제한 완화 정책을 급히 준비했고 그것을 발표할 기자회견을 11월 9일에 열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민심 잡기용 정책이었고 제한을 좀 간소화하는 것이지 정말 무제한 자유화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자회견장에서 이탈리아 기자가 '정책 시행 시점'을 물었고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기자회견에 임한 동베를린 공산당 책임자가 '즉시'라고 말실수를 저지릅니다. 사실 이 정책 시행은 다음날부터 이뤄질 예정이었고, 내용도 여행 제한 완화지 폐지, 그걸 넘어 국경 폐지를 담는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기자는 회견 내용을 본사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타전했습니다. 

 

보통 이게 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영향을 더 크게 준 것은 서독판 9시 뉴스였습니다. 북한이 우리나라 방송 시청을 금지하는 것과 같이 동독도 서독 방송 시청을 금지했는데, 베를린은 그 특수함 때문에 전파방해같은 물리적인 수단을 쓸 수 없어 동베를린 사람들은 알음알음 서독 방송을 보곤 했습니다. 특히 뉴스는 동독 방송보다 더 정확하다고 정평이 났는데, 이 방송에서 '즉시 동독 국경을 개방한다'고 내보냈습니다. 즉 동독 관계자의 말실수에 대해 정책 내용을 조금 부정확하게 내보낸 것입니다. 이 방송을 보고 동베를린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이걸 뭔 수로 막을까요?

 

이렇게 서베를린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에 몰려들자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한 국경 경비대원들과 세관원들은 패닉에 빠집니다. 그야말로 중과부적. 수만명의 동베를린 시민이 몰려드는데 그렇다고 학살을 벌일 수도 없기에 이들은 사람들을 달랠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총을 쐈다면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들은 동독 공산당에서도 패닉에 빠졌는데, 서베를린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하려는 시도, 여권 소지자만 보낸다는 시도 등을 고민했으나 상황은 너무 빠르게 변했습니다. 백약무효. 결국 다음날 동독측에서는 '신분증만 가져오면 출국비자 형식으로 서독 출입 가능'으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 정책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때려 부수기 시작합니다. 워낙 철근 콘크리트로 단단하게만들어 그냥 사람이 들고 온 망치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아예 드릴에 불도저까지 등장하자 일부 장벽이 무너졌고, 동독 국경수비대가 나서 이걸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무너진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결국 포기하고 12일에는 베를린 장벽의 공식적인 철거가 시작됩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누구도 손 쓸 수 없게 일어난 일이라 이것도 해프닝이 좀 있었는데, 이 틈을 노려 탈동, 아니 탈북한 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북한 출신 사업가인 전철우가 그 주인공인데, 동독에 유학갔다 베를린 장벽 붕괴 뉴스를 듣고 바로 동베를린으로 가서 탈동, 아니 탈북한 것입니다. 

 

참고로 베를린 장벽이 그 날 당일에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동서베를린 통행을 금지하는 상징으로서의 장벽이 당일에 무너진 것이지, 물리적인 수십km 길이의 철근 콘크리트 장벽이 그렇게 금방 해체되는 것도 아니고 지뢰지대나 철조망 등 장벽 이외에 해체해야 할 것도 많아서 실제로는 다음 해 독일이 통일된 뒤에도 해체 작업이 이뤄져 최종 철거까지는 3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벽이 철거된 것은 아니며 역사 기록 보존 차원에서 남은 곳들도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 자체는 아니지만 미국 통치 영역 서베를린에 있던 검문소인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의 관광 명소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