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6월항쟁 38주년입니다. 극우를 추종하는 괴상한 커뮤니티들은 민주주의와 민주화를 모욕하기에 바쁘지만 그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윤가놈의 쿠데타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겨우 다시 일단 제대로 된 것 처럼 보이는 정부를 다시 세웠습니다. 올 해의 6월은 다른 때의 6월과는 그 느낌이 한결 다른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지난 포스팅도 대한뉴스였음에도 오늘은 대한뉴스에 나온 6월항쟁 관련 내용을 올려보고자 합니다. 물론 대한뉴스라는 매체의 특성상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은 하나도 안 올라오는 특성상 정작 6월항쟁에 중요한 사건 가운데 상당수는 올라오지 않지만, 그나마 몇 건 올라온 내용을 중간중간 소개하며 진정한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보기로 합니다.
학살자 전대머리의 5공화국 정권은 3S 정책과 통금 폐지 등 국민을 통제하던 것을 풀어주는 척 했지만 정작 언론통제와 정적에 대한 복수는 썬글라스 박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잔혹하게 했습니다. 정권을 잡는 시점부터 광주에 피바람을 불게 만들었고 비록 미국의 압력으로 실패하기는 했으나 타협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최대의 정적, 선생님께 사형 선고를 내렸으며 결국 정치적으로 무력화를 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삼청교육대 등 국민을 국가가 납치하는 범죄까지도 저질렀습니다. 정치는 기존 야권 정치인들을 다 무력화시키고 정권에 순종하는 사람들만 모아다 관제야당을 만들어 사실상 민정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러니 학생운동도 두들겨 맞는게 당연했고 80년대 초반은 이렇게 나라가 꽁꽁 얼어 붙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균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 1985년의 12대 총선이었습니다. 총선 직전에는 032와 선생님 계열(즉 상도동/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사실상 연금 상태인 두 사람을 제외하고 뭉쳐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했는데, 당시 전대머리와 민정당은 조중동과 KBS 등 언론을 총동원하여 신민당에 생채기를 내고 관제야당 정치인들을 신민당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협박하고 심지어 선거일까지 2월로 고의로 앞당기는 등 별의 별 노력을 다 했지만, 대놓고 티를 내는 압박에 국민들은 오히려 야권을 지지해 야권의 지역구 당선자 수가 민정당을 뛰어 넘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당에 유리한 선거제 때문에 전국구(지금의 비례대표)는 민정당이 압도적으로 가져가 과반수 의석은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정도면 전대머리도 위기를 느낄만한 일이었습니다.
이 신민당은 1986년 말, 사실상 바지 대표나 마찬가지였던 이민우가 전대머리와 야합하여 내각제를 하겠다는 '이민우 구상'을 내놓으면서 사실상 쪼개져 몰락하고, 실제적인 지분을 갖고 있던 상도동/동교동계는 이탈해 통일민주당을 세웁니다. 이걸 막겠다고 당시 안기부장이던 장세동이 정치깡패를 동원해 창당대회를 방해한, 일명 '용팔이 사건'이 6월항쟁의 프롤로그격 해프닝으로 남았습니다. 이 사건 역시 이후 6월항쟁의 여론에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다만 이 보다 본격적인 6월항쟁의 서막은 직전해인 1986년 5월의 인천 5.3 민주항쟁입니다. 위의 12대 총선에서 야당이 선전하면서 숨죽이던 민주화 세력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는데, 문제는 당시 야당의 거두인 상도동/동교동계 모두 이 재야쪽에 그리 따뜻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집회 직전에는 대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투쟁의 방법으로 보는 재야 세력에 비해 양김은 '빨간물 먹은 것들이 투쟁이라고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보수들의 전가의 보도인 빨간 페인트칠을 신민당에 하는 것을 막겠다는 나름의 생존 전략이겠지만 이는 재야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고, 5월 3일에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의 대학 운동권/노동운동가들은 이들과 별도로 결집했습니다. 이들은 대통령 직선제 말고는 공통점이 없는 어중이떠중이 집단에 가까웠지만, 전대머리 입장에서는 봐줄 수 없던 저항이라 꽤나 잔혹하게 진압을 했고 그 결과 잠시 수도권의 학생/노동운동은 치명타급 피해를 입습니다.
그나마 남은 대학 운동권들이 집결해 10월 28일에 건국대학교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이 조차 전대머리 정권은 그야말로 잔혹하게 진압합니다. 사실 이 집회에서 경찰측은 단순히 행사를 해산시킬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체포할 목적으로 고의로 건물 한 곳에 시위대를 몰아 넣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는데, 이 진압 과정에서 국민들이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전대머리 정권은 국민 대상으로 역대급 사기를 벌입니다. 바로 '금강산댐'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전에도 한 바 있죠.
되짚어 보는 대한뉴스(30) - 거짓이 만든, 결과만 좋은 평화의댐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는 '결과 우선 주의'입니다. 사실 이건 당연한 것이 '결과가 좋지 못한 것 =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 손해가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라면 과정을 따져서 과정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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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사건은 기존 야권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민주화 세력에서 학생운동/노동운동 세력이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분리되는 계기를 만들었지만, 이들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한 것은 6월항쟁에 영향을 주는 여러 사건을 가져옵니다. 먼저 일명 '권인숙 사건'으로 불리던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이 후속 처리에서 벌어졌고, 성고문 피해자를 '성을 무기로 쓰는 테러리스트'로 만들어 버린 수사 방향과 땡전뉴스급으로 정부의 주장만을 받아 적은 언론의 펜을 본 국민들은 분노의 에너지 전압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분노가 본격적으로 터진 것이 일반적으로 6월항쟁의 프롤로그로 불리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입니다.
'탁 치니 억 하더라'라는 누가 들어도 멍멍 사운드인 소리를 경찰이 철판을 깔고 해댔지만 이미 고문의 증거는 여러 경로를 통해 새나오는 상황. 처음에는 언론도 정부 통제를 따랐지만 결국 증거는 새 나왔고, 한 번 증거가 나오고 언론들이 싣기 시작하자 금간 제방이 금방 무너지듯이 정부의 언론 통제는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나중에서야 고문 사실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일부 경찰의 일탈에 불과하다'며 꼬리자르기로 일관했습니다. 이렇게 국민들의 분노의 장작이 쌓이는 봄이 왔고...
이렇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정부의 발뺌이 지속되는 와중에 수감된 경찰들이 '위에서 시켜서 했는데 왜 우리만 팽 시켜!'라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소리를 옆방에 수감된 재야 정치인 이부영이 듣고 그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유출시켜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공개함으로서 이 사건에 윗선의 지시가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6월항쟁 이후가 되지만 이 윗선은 치안본부장, 즉 현재의 경찰청장님이 드러납니다. 이 부분은 영화 1987에 잘 나와 있기도 하죠.
이 당시만 해도 경찰이 권력의 개였고 검찰은 그런 느낌이 덜했는데, 당시 경찰은 내무부 치안본부 형식이어서 정권의 통제가 쉽기도 했고, 반대로 검찰은 경찰의 조사 결과를 받아 그냥 기소만하는 기계 취급을 받았습니다. 검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덮는 데 미지근했던 이유도 이런 역학관계 때문입니다. 검찰이 지금처럼 정치검찰이 된 것은 웃기게도 민주화가 원인인데, 과거에 안기부~국가정보원이 갖고 있던 공안 사건 수사권을 검찰이 본격적으로 갖게 되면서 지금도 검찰의 3대 세력으로 불리는 공안계 검사들이 검찰의 주류를 장악하기 시작한 때를 검찰 정치세력화의 본격적인 계기로 봅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민들의 화 레벨이 100도에 가까이 이르고 있는 상황에 전대머리는 휘발유를 하나 더 뿌립니다. 바로 4.13 호헌조치입니다. 역사 공부를 학교에서 졸지 않으셨다면 다들 아시다시피 5공화국은 4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체육관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처럼 아예 무슨 후보를 지지한다고 해놓고 선거인단을 뽑아도 실제 표심과 선거 결과가 서로 왜곡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간접선거인데, 그냥 군사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사람들만 선거인단 후보라고 나와서 누굴 뽑아도 결과가 똑같아지는 선거가 무슨 공정성이 있는지요. 당연히 대통령 직선제는 국민의 열망이었고 12대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도 야권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당에서는 총선만 유리하게 잘 치르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장기 독재가 가능한 내각책임제 개헌론을 들고 나와서 서로 타협이 안 되었습니다.
전대머리의 4.13 호헌조치는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올림픽 올인해야 하니 그냥 한 번 더 간접선거로 대통령 뽑고 다음 선거에서나 개헌 논의하자. 이거 반대하는 넘은 다 빨갱이.' 그 자체였습니다. 즉 국민들 대다수를 그냥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때려 잡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박종철 사건이 정부 차원에서 조작되고 수사도 지연되고 있는데 이 상황이 벌어지자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그 상황에서 5월에 위에 적은 정의구현사제단측의 폭로가 나오자 야권을 비롯한 민주화 세력들은 본격적으로 집결하여 6월 10일로 예정된 민정당 전당대회(대통령 후보 선출대회)에 맞춰 대규모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사이에도 전국에서 크고 작은 시위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루 전... 6월항쟁의 뇌관이 드디어 터집니다. 바로 이한열 피격 사건입니다.
6월 9일은 본격적인 시위 전에 일종의 출정식 개념으로 각 대학에서 집회가 있었는데, 당연히 경찰은 이걸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잡아 넣겠다고 발악했습니다. 이 때는 꿈의(?) 1980년대답게 시위만 벌어지면 최루탄이 등장하는데, 지금은 정말 훈련소나 예비군훈련장 가야 맡을 수 있는 CS가스 성분의 최루탄이 도시를 심심하면 덮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최루탄은 사람이 직접 맞지 않게 곡사 사격을 해야 하고 발사기에 안전 장치도 있으나, 경찰에서는 이 장치를 무력화한 뒤 시위대를 향해 직사 사격을 하는 경우가 공공연하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직사로 쏜 최루탄에 시위중이던 이한열 열사가 머리에 직격당해 쓰러졌고, 이 순간을 사진이 로이터 사진 기자에 의해 국내외 언론에 실리게 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변해 경찰과 보안사령부에서 이 사진을 올린 언론사 기자들과 간부들을 잡아 넣겠다고 나설 시간조차 없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예정대로 민정당에서는 물이 전대머리의 손을 잡고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오를 때 전국 도시의 거리는 그야말로 최루탄과 고성이 오가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특히 6월항쟁에는 30~40대의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의 시위 참여가 돋보였는데, 보통 이런 민주화 시위는 정치인 아니면 대학생/노동운동의 전유물처럼 생각되었으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피격 사건은 이러한 숨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이 상황을 막기 위해 전대머리 정권은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정권 차원의 바보짓도 시위 규모를 키웠습니다. 경찰은 시위 규모 축소를 위해 사대문을 비롯한 시내의 버스 및 지하철 무정차 통과, 기업의 조기 퇴근을 시행했는데 두 가지가 겹치면서 오히려 시위 규모가 커지고 말았습니다. 직장인 입장에서는 퇴근은 일찍 했는데 버스와 지하철이 안 서니 집은 못 가고, 하필 서머타임을 시행해 시간에 비해 해는 기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랬다. 난 민주투사었던 것이다. 시위하러 가야징.' 모드로 바뀐 것입니다. 나중에 이를 회상할 때 사람들은 전대머리 정권이 국민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비아냥댔을 정도입니다. 서머타임도 올림픽 이후 그냥 폐지되었구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때 웃기고도 슬픈 나라 망신도 있었는데, 당시 마산(지금의 창원시)에서 열리던 A매치 축구 경기에서 시위 진압용 최루탄 가스가 들어와 선수들이 쓰러지는 등 사단이 벌어졌고,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 몰수무 선언을 했습니다. 이 경기가 대한민국에서 주최한 대통령배 대회였기에 정말 나라 망신도 보통 망신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시위는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에 전국의 경찰력을 특정 지역에만 집중하여 시위를 진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경찰과 정부는 시위 초기에 판단을 엉뚱하게 한 면도 있는데, 바로 '광주만 조용하면 된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6월항쟁 초기에 광주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조용한 편이었는데 학살을 당한 기억 때문에 '먼저 정을 맞지 말자'는 심리도 있어 본격적인 항쟁 참여 타이밍을 재고 있던데다, 시위에 폭발력을 더해주는 대학생들이 당시 여러 사정(학내 민주화, 축제 등)으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부가 광주에만 관심을 갖던 사이에 정작 시위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활활 불타면서 전대머리 정권이 초기 대응(?)을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6월 중순이 되면 매일같은 시위 진압으로 피로에 지친 경찰이 시위하는 시민들에게 힘과 쪽수 모두에서 밀리고, 경찰이 지닌 최고의 무기인 최루탄은 소비량이 생산량을 웃도는 지경에 이르러 사실상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가 되자 사람 죽이는 것을 쉽게 아는 전대머리는 군 동원, 즉 위수령과 계엄령을 검토하게 되는데 실제로 군 상층부에서는 내부적으로 어떻게 병력을 동원하고 배치할지 검토는 끝낸 상황이었습니다. 시위를 진행하는 측에서도 전대머리가 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했고, 그 다음은 당연히 광주의 2라운드가 될 것은 뻔했기에 긴장감은 높아져 갔습니다.
이 때 중요한 변수가 나타났는데, 바로 '미국'의 등장입니다. 1980년에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다 산화한 피가 흘러 내릴 때 미국은 그야말로 방관 모드였습니다. 전대머리를 막아달라는 광주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이후 벌어진 학살에 대해 묵인하는 모습을 취했는데, 그 결과 기존에는 '미국이 다 해주실 거야'라고 믿었던 민주화 세력이 실망하여 오히려 반미로 돌아섰고 지금의 종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계기를 만듭니다. 80년대 초반 내내 미국은 지금까지 없던 대한민국의 반미 물결에 당황하게 됩니다. 물론 당시 미국은 이란혁명과 이후 발생한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등 중동에 모든 관심이 쏠려 한반도를 신경 쓸 상황은 안 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 때의 미지근한 대응이 대한민국에 반미 세력을 키웠다는 점 만큼은 뒤늦게나마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1980년과 달리 1987년의 미국은 한반도 상황을 외면할 정도로 바쁘지도 않았던데다 기존에 국민들의 바램과 무관하게 친미 독재자를 양산하던 방침도 바꿨는데, 이는 친미 독재자들이 나라를 엉망으로 운영하면서 중남미를 비롯한 각국 국민의 반미 성향을 더 강화시키는 결과만 낳았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을 앞두고 공산권들과 관계도 개선되려는 찰나에 그 장이 되어야 할 대한민국이 군사독재와 학살로 엉망이 되는 것도 시기적으로 좋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적극적으로 전대머리가 위수령 또는 계엄령을 내리려는 움직임을 막았습니다.
먼저 미국은 주한미군을 통해 한국군의 동향을 체크하고 CIA를 통해서는 야당, 정확히는 상도동계와 접촉하며 현재 국민들의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이 때 CIA 담당자는 032의 복심인 최형우 전 의원에게 '이 상황이 온 것이 다 1980년의 광주를 외면했던 미국 때문이고, 전대머리가 군을 동원하면 032와 상도동계는 집단 분신자살을 벌일 것이다'라고 쓴소리 겸 협박을 들어야 했습니다. 국내 여론을 확인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전대머리에게 자중할 것을 주문했는데, 먼저 부통령 방한 계획은 주미 한국 대사의 읍소에 철회하고 대사를 통한 친서 전달로 대체했는데, 이 친서도 정부에서 안 받으려 하자 주한 미국 대사는 외교적으로 못 쓸 표현까지 써가며 항의한 끝에 전대머리와 만남을 성사시켰습니다. 이 때 미국의 입장인 군 동원을 하지 말 것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시민과 대치해야 할 군 내부에서도 1980년과 달리 병력 동원에 대한 반발이 컸습니다. 1980년에는 정권을 갓 장악한 위세등등한 전대머리의 지시를 받아 군부가 학살을 벌일 수 있었고 총부리를 들이 댈 대상도 광주 하나였다면, 1987년에는 지는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전국, 그리고 전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대머리에게 직접 명령을 받은 대장급들은 빨리 아래에 군 배치를 준비하라고 독촉했지만 상황을 읽을 줄 알았던 사단장급의 실무 지휘관들은 '군 동원했다간 Bird 된다'는 미래를 예상했습니다. 군 동원이 미국의 지지도 못 받을 것이 뻔했고, 시위 규모도 전국적이라 이걸 진압하겠더고 전 국민을 상대로 총부리를 들이댔다간 내전이 벌어질 것도 뻔했기 때문입니다. 계엄령을 내리면 핵심이 되어야 할 보안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이 더 군 동원에 반대할 정도였는데, 이들도 하나회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에는 전대머리의 하나회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졌다는 의미가 됩니다.
경찰력으로는 시위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정작 군을 동원하려 해도 군 내부에서 반발이 심하고 미국조차 군을 움직이는 것을 대놓고 반대하는 상황에서 무리해서 학살극을 벌이면 전대머리는 군부 쿠데타를 맞아 죽거나 쫓겨나는 미래가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전 국민을 학살할듯이 군 동원을 재촉하던 전대머리도 여러 채널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목소리에 슬슬 상황 인식을 제대로 하기 시작합니다. 위의 대한뉴스처럼 6월 24일에 야당, 정확히는 상도동계와 접촉해 협상에 나섰으나 032 입장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말고는 타협을 할 이유가 없어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 6월 25일에는 선생님에 대한 가택연금을 풀었지만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민정당, 즉 물 세력에서도 직선제 수용을 압박하자 결국...
6.29 선언이 나옵니다. 즉 대통령 직선제 발표가 나온 것입니다. 정확히는 6월 29일에 물이 대통령 후보직을 걸고 요구한다고 발표한 것을 전대머리가 받아들인 형식을 취했습니다. 6.29 선언에는 직선제 이외에도 선생님에 대한 사면을 포함한 정치범 석방, 언론 탄압 중단, 지방자치제 시행 등을 담았는데, 다만 이 때에도 1980년의 광주에서의 학살 사과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 학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은 있었던 물과 달리 전대머리는 죽는 그 날까지 스스로를 떳떳하다 믿었기 때문입니다. 6.29 선언으로 민주화의 토대가 세워졌고, 이후 새 헌법에 대한 투표가 이뤄져 현재의 6공화국, 1987년 체제가 수립됩니다.
6월 항쟁은 공식적으로는 6.29 선언으로 종료되지만 실제로는 6월 항쟁의 뇌관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결국 숨진 7월 5일, 그리고 이 장례식이 치러진 7월 9일까지 이어집니다. 6월 항쟁 이후 진정한 민주화는 이후 야권 분열과 3당 합당의 결과 두 번 대통령이 바뀐 이후에나, 그것도 민주당계 정당과 썬글라스 박의 잔재(김종필)의 조합이라는 비정상적인 연합 이후에나 이뤄졌지만 이 날은 대한민국 전체의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의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자유를 얻기까지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을 한 세대만에 잊고 윤가놈이라는 괴물을 낳기도 했습니다. 피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어리석음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 피를 흘리기 전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켜내려는 의지를 관철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2025년의 6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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