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극단주의, 그것도 극우가 판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극우들이 서로 충돌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예. 미국 극우인 화투장과 이스라엘 극우인 네타냐후가 손잡고 이란 극우인 알리 하메네이를 폭격으로 끔살시킨 모습을 말입니다. 덕분에 세계는 엄하게 석유 대란을 겪고 있습니다. 사실 뒤에 적겠지만 이건 누가 나쁘고 누가 착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냥 서로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만.
그런데 미국과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이란을 적대시하고, 이란 역시 두 나라를 향해 막나가는 태도를 보일까요? 그런데 이 세 나라가 50년 가까이 전에는 그냥 한 편이었다는 사실을 아실지요? 그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이란과 여러 나라가 변하는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몇 가지 나비효과를 대한뉴스를 핑계로 적어봅니다. 아, 우리나라에도 정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이 포스팅은 카테고리는 대한뉴스지만 정작 이란 혁명에 대한 대한뉴스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위의 대한뉴스는 일종의 짤방이나 마찬가지이며, 굳이 말하면 이란 혁명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국가간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내용에 가깝죠. 당시 군사정권이 이란의 혁명 소식이 우리 국민의 귀에 들어가면 시위를 더 할까봐 두려워서 대한뉴스에서 안 다룬 것은 아니라... 그냥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란 혁명의 과정을 그냥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이란 혁명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1978년 8월의 '렉스 극장 화재'가 시발점입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벌인 테러라는 설이 주류지만 당시 이란에서는 팔라비 왕조의 비밀경찰이 반대파를 학살하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1978년 내내 반 팔라비 정권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수백명이 죽은 것은 그야말로 제대로 불을 지른 것이죠. 1970년대 이란은 겉으로는 잘 나가는 것 처럼 보여도 부유층만을 위한 경제정책으로 양극화가 답이 없었고, 서민들을 비밀경찰을 동원해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추가적으로 1차 석유파동이 끝나면서 기름값이 떨어지자 경제도 추락했죠. 그러니 왕이라는 이름의 독재자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 때 프랑스에 망명중이었던 반체제 인사이자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반체제 거물들을 모으며 이란 내부의 시위를 부추겼습니다. 팔라비 정권은 군을 동원해 시위 군중을 탄압하면서 나름 유화책도 제시했지만 이미 이걸로 해결될 단계는 지났습니다. 특히 1979년 들어서는 서방에서 이란을 버리기로 하면서 군에서도 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아예 정권이 붕괴할 때 차기 지도자가 될 호메이니와 접촉하기까지 합니다.

팔라비 2세는 더 버티고 싶었으나 하필 이 때 옆 아프가니스탄에서 쿠데타가 벌어져 대통령 일가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조만간 쿠데타가 벌어지건 군이 합세한 시민혁명이 벌어지건 자기 목숨은 없겠다 생각하여 결국 1979년 1월 16일에 퇴위를 선언하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2월에는 호메이니도 귀국하는데, 당시 이란 정부를 이끌고 있던 총리에게 '당장 꺼져, 그 자리는 내 자리야!'를 외쳤습니다. 당연히 이를 들을 리 없으니 호메이니는 자기를 지지하는 대다수 이란군과 손잡고 내전을 벌여 2월 11일에 이란 정부, 즉 이란 제국을 끝장냅니다. 사실 이 때문에 이란 혁명은 시민 혁명의 길을 걸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호메이니와 이란군 대다수가 손을 잡고 팔라비 없는 이란 정부를 전복한 쿠데타나 다름 없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사실 현재의 이란 정부의 형태가 부카니스탄과 정치 형태가 상당히 다름에도 비슷하게 된 이유가 이러한 이유(군과 손잡고 정권을 장악하여 최고지도자가 군을 직접 제어)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란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바로 새 나라가 선 것은 아닙니다. 이란 국민들은 팔라비 왕조를 싫어한 것이지 팔라비 왕조의 세속적 이슬람주의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고, 반대로 호메이니는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신정국가의 필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3월에 국민투표를 형식적으로 하여 압도적으로 이슬람 신정국가 건국이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이는 반대파를 학살, 협박하는 등 상당한 부정선거 요소가 개입되었고, 이후에도 반대파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호메이니는 같이 혁명을 벌인 반체제 인사들까지 점차 숙청하여 독재의 틀을 마련합니다. 어쨌거나 1979년 12월에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 건국 국민투표까지 진행되어 현재의 이란 체제가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게 대한뉴스에 이란 혁명 관련 내용이 없는 것과 무슨 관계냐 하면... 1978년 후반~1979년 말에 우리나라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예. 10.26입니다. 1차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박살나면서 썬글라스 박 유신 정권에 대한 지지는 땅으로 추락했고, 긴급조치 남발로 국민들을 탄압하면서 이란 못지 않게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1979년 10월에는 부마항쟁이 벌어졌는데, 아예 PK 지역에 계엄령을 선언하고 차지철이 '100만명쯤 죽여도 별 말 안 나온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10월 26일 밤에 썬글라스 박과 차지철은 시바스 리갈을 앞에 놓고 야수의 손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대한민국도 이런 파란만장한 시절이었으니 나름 친했다고는 해도 이란의 상황에 귀가 갈 리 없었습니다.

추가적으로 이 이란혁명은 나름 대한민국의 역사에 간접적으로 어둠을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1979년 11월, 호메이니의 신정국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때, 테헤란의 주 미국 대사관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침입해 대사관 직원들을 감금하는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터집니다. 당시 팔레비 2세가 미국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 신병을 넘기라는 요구였습니다. 여기에 이란 최고지도자가 된 호메이니가 '배째'를 선언하면서 미국은 경제/군사적인 모든 압박을 가했고, 구출작전 실패라는 촌극까지 벌이며 이 사태를 1981년 1월까지 끌었습니다. 그러다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게 된 호메이니가 다급해져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인질을 풀어주고, 미국은 동결한 팔라비 2세 자산을 이란 정부에 돌려주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이게 어쨌냐구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죠.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뭔 일이 있었을까요? 1979년 12월에는 전대머리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1980년 5월에는 저 전대머리가 광주를 본보기로 만든다고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흔히 말하는 서울의 봄이 끝나고 광주민주화항쟁이 처절한 피가 흐르는 도로를 남기고 진압당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민주화 세력들은 '미국님이 도와주실거야'를 외치며 미국의 개입을 원했으나 미국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전대머리가 이뻐서가 아니라 저 대사관 인질 사건 때문에 이란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대한민국은 아예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미국에 대해 모든 면에서 호의적이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에 '반미'라는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고, 이는 주사파와 NL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괜히 6월 항쟁 때 CIA 담당자를 만난 최형우 의원이 '이 사단이 난 것은 다 미국이 전대머리 정권을 감싼 결과'라고 대놓고 욕한게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반미를 낳은 그 원인 제공을 이란이 한 셈이라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이란은 본의는 아닐지라도 꽤 큰 태클을 건 것입니다.

그래도 의외로 대한민국과 이란은 무슨 척을 진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팔라비 왕조 시절에는 당연히 친했고, 그러하니 호메이니 정권에서는 적으로 돌변하지 않았냐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고 외교적인 급은 좀 떨어졌지만 단교하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민간 교류와 교역도 줄기는 했는데 그래도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대략 2010년대 중후반까지도 서서히 그 양이 줄기는 했는데, 그래도 교역이 끊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대 이란 제재 강도가 더 세지면서 우리나라도 어쩔 수 없이 교역을 더 줄이고 제재에 동참하면서 관계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단교를 선언하거나 할 정도는 아니고 좀 사이가 좋지 않은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 2010년대 중반까지, 즉 미국에서 강하게 협박하기 전에는 이란에서 원유를 수입했습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란산 석유는 퀄리티가 좋기로 유명했기 때문인데, 반대로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의 원유는 그냥 쓰레기 기름이라 고도 정유 기술이 없으면 써먹기도 힘듭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정유 기술은 전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그래도 원유의 품질이 좋아야 석유제품 품질도 좋고 원가도 저렴해집니다. 그걸 미국 제재에 동참하면서 수입을 못 하게 된 것은 우리 입장에서도 좀 아쉬운 일이기는 합니다., 지금은 수입 다변화로 꼭 이란산 석유가 아니어도 된다 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이란산 원유 도입이 막히면서 그나마 유지되던 이란과의 무역은 거의 막히게 되고, 기존 석유 수출 예금까지 동결하면서 관계가 더 나빠졌습니다.
이 이란 혁명은 우리나라에만 크고 작은 영향을 준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슬람 극단주의에도 상당한 영향을 줍니다. 그 전에 이란-이스라엘 관계부터 잠깐 하고 들어갑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미국과 손잡고 이란을 폭격하는 난리를 치고 있지만, 이란 혁명 이전에는 반대로 이란과 이스라엘은 어깨동무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 노래를 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이게 진짜입니다. 중장년층 남성들을 불타게 만든 만화, '에어리어 88'을 좀 기억에 떠올려 보십시오. 이 만화가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 등 당시 중동 상황에서 많은 모티브를 얻었다는 것은 뭐 다들 아는 것입니다만, 이 만화 초중반에 88 기지가 한 번 싹 쓸려나가 기체가 없을 때 어느 나라에서 어느 기체를 공여받았다고 하던가요?

미라주 V의 설계를 프랑스 정부의 도움(?)으로 얻어 개발한 이 물건, 실제로 이란에 도입된 적은 없습니다만 이 설정이 납득될 정도로 팔라비 왕조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중동 국가 가운데는 이스라엘을 가정 먼저 인정했고, 이스라엘에 석유를 비롯한 여러 전략자원을 공급했습니다. 저 당시만 해도 두 나라 모두 친서방 국가였고, 이스라엘과 이란 모두 이집트나 사우디, 이라크 등 수니파 중동 국가들을 적 또는 잠재적 적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이란 혁명이 나면서 호메이니는 이스라엘을 '미국 앞잡이'라고 선언하며 단교해버립니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말은 외교의 기본이라 서로 인접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이란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은 별로 이득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4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비롯한 인접한 '좀 센'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는 최소한 원수가 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원교근공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이란 입장에서도 반미로 돌아선 만큼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 이스라엘과 친하다고 미국과 사이가 좋아지는게 아니라서 메리트가 없어졌습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을 내부적인 불만을 잠재우는 '외부의 적'으로서 인식을 시키는게 이란 정권 입장에서는 더 나았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극우(리쿠드)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구요. 그래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다른 서방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할 때 이스라엘은 이라크를 더 싫어해서 몰래 이란을 지원했는데, 전쟁이 끝낸 뒤 이란은 그냥 입을 닦았습니다. 이게 서로 거리가 먼 두 나라가 상종 못할 웬수가 된 이유입니다.
다시 이슬람 극단주의로 돌아가서... 사실 지금 난리를 치고 있는 이슬람 극단주의는 거의 대부분 이란이 종주국인 시아파가 아닌 사우디 중심의 수니파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란이 욕을 먹는 것은 이란 혁명이 이러한 이슬람 극단주의 확대에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이슬람 극단주의는 종파와 무관하게 이슬람 전체의 문제이며 책임이지만, 대다수는 수니파, 그 가운데서도 와하브파에 있습니다. 극단주의, 타종파/타종교 혐오사상, 샤리아(이슬람 율법) 절대주의, 지도자에 대한 절대충성 등 정치적인 꼴통 사상이 집약된 와파브파를 사우디와 카타르 등 중동 수니파 왕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면서 이들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지금도 사우디에서는 사우디 왕가만 건드리지 않으면 와하브파가 무슨 깽판을 치건 상관치 않으며(반대로 왕가를 공격하면 철저히 밟아버립니다.) 오히려 해외에서 깽판을 치라고 지원을 하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시아파인 이란이 욕을 먹는 것은 이 이란 혁명을 보고 와하브파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우리 내부의 배신자인 이란도 신정국가의 꿈을 이루는데 우리라고 못 할거 있냐'며 본격적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깽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벌어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에 여러 와하브파 극단주의자들이 의용군으로 가담했는데, 전쟁이 끝나고서도 이들은 그 피맛을 잊지 못하고 전 세계에서 극단주의 테러를 벌이게 됩니다. 오사마 빈 라덴도 이러한 와파브파 -> 무자헤딘 ->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트리를 제대로 밟았습니다. 종파는 서로 다르지만 이란 혁명의 성공은 엉뚱하게 와하브파 등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의 마음에 불을 당겨버렸습니다. 이란 혁명은 정말 간접적으로 세계에 정말 많은 영향을 준 것입니다.
자, 정리를 해봅니다. 이란 혁명은 이란의 무능하고 탐욕적인 세속 왕정이 뒤집히고 근본주의 독재 신정국가가 들어선, 이란 국민들 입장에서는 그냥 다 안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혁명이 당시 국제 상황과 뒤얽히면서 이란을 벗어난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왔습니다. 이란과 미국이 극한 대립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관심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은 살인마 전대머리가 등장하며 광주의 피를 불렀고, 이는 대한민국에 반미와 NL이라는 세력을 등장시키며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는 물론이며 대한민국 내 정치와 사회에도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영향(그 넘의 '빨갱이' 페인트칠 등)을 남겼습니다.
팔라비 정권까지는 서로 친구를 먹던 이란과 이스라엘은 이란 혁명으로 스스로 이스라엘을 걷어 찼고, 이스라엘 역시 가까운 적을 억누르는 먼 친구였던 이란이 주변 국가와 관계 개선으로 필요가 없어지자 서로를 내부의 단결을 위한 소재(즉 외부의 적)으로 삼으며 적대적 동반 관계를 구축합니다. 며칠 전 폭격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이란 혁명의 성공은 엉뚱하게도 내부의 적인 수니파의 극단주의자들, 즉 와하브파를 비롯한 근본주의자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들은 사우디 왕가의 지원하에 세력을 키우고 덤으로 아프간 전쟁에 참여하면서 군사적인 능력까지 얻은 끝에 이후에 벌어지는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를 부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시아파라고 테러를 안 저지른 것은 아니라서 이란이 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 = 테러'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 역시 이란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이 손을 잡고 이란을 공격한 것은 그냥 미국/이스라엘의 극단주의와 이란의 극단주의가 서로 충돌한 것 뿐입니다. 어디에도 정의 따윈 없는 그냥 각국 정권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 뿐입니다. 그 덕분에 엄한 우리나라 등 다른 나라들이 피눈물을 쏟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극단주의도 결국 위로 가면 다 원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대립이 서로간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닌 나비효과가 되어 다른 나라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게 결코 남의 나라의 이야기는 아니며 언젠가 우리나라의 다른 문제로 돌아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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