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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55) - 어린이날, 그리고 우주 경쟁의 시작

dolf 2026. 5. 5. 01:05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선물 받고 노는 날, 어린이를 둔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날, 솔로들과 다 큰 아이들은 둔 가정에서는 그냥 휴일... 다들 이 날을 느끼는 방법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어린이날을 보낼 때에도 세계는 움직입니다. 다른 나라는 딱히 휴일도 아니고, 사건과 사고는 휴일도 없으니까요. 

 

과거 5월 5일에 세계에서는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야구(KBO)에서 국내 최초로 노히트 노런이 있었고, 이 날 춘천에는 중공에서 여객기가 납치당해 긴급히 착륙하면서 '훈련이 아닙니다'로 어린이들이 충격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주영국 이란대사관에서 발생한 인질 사건을 SAS가 진압하는 '님로드 작전'이 벌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전 이야기는 하고 싶지만 하필 이 직후에 전대머리가 광주에서 학살극을 벌이면서 대한뉴스에서 이걸 다루지 않아서 이야기를 못 하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단 어린이날 관련으로 있었던 과거 대한뉴스 이야기 포스팅 두 개를 먼저 소개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갑니다.

 

 

되짚어 보는 대한뉴스(26) - 어린이날, 그리고 만화 탄압

아, 즐거운 어린이날 연휴입니다. 네? 어린이날은 어제였다구요?! 그건 말하지 않는게 불문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에게는 선물 받고 놀러 가는 날이라서 부모님들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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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45) - 봉황이 날아왔다?! 중국민항 납치 사건

요즘 길을 가면 되도 않는 부정선거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무나 중국인이라 갖다 붙이는 멍멍 사운드가 많이 보이는데, 정말 윤가놈 공무원증을 파쇄한 다음 내란죄로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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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은 우주덕들에게 나름 중요한 날입니다. 바로 본격적인 '우주 경쟁'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이 최초로 우주에 우주인을 올려 놓은 '프리덤 7'이 발사된 날이 바로 1961년 5월 5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우주 경쟁 이야기를 좀 짧게 다뤄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좀 슬프게도 님로드 작전 이야기가 대머리의 학살극과 그걸 무마하기 위한 대한뉴스의 공작(?)에 묻혔듯이 정작 이 프리덤 7 발사 이야기도 대한뉴스에서는 좀 작게 다룹니다.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야기가 왜 대한뉴스에서 조용했냐 하면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썬글라스 박 때문입니다

 

썬글라스 박이 5.16 쿠데타를 저 직후에 일으키면서 묻혀버린 것입니다. 다만 정말 다행히도 나름 중요한 사건은 사건이라서 대한뉴스에서 안 다룬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해당 뉴스인데, 정작 이 내용은 미국인들에게도 잊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도 당대 미국인에게도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불쌍한 어떠한 우주인 이야기와 함께 뒤에서 해보기로 하고...

 

사람은 19세기에도 달에 가는 꿈을 꿨습니다

 

인간이 달을 비롯한 우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조차 따질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이 손에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 때는 본격적으로 화약, 더 정확히는 '대포'와 '로켓'을 발명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수백m 앞을 날아가던 대포와 로켓이 기술 발전으로 수 km 단위로 날아갈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대포와 로켓을 더 크고 더 강하게 만들면 우주로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꿈꿨습니다. 근대 SF의 거장 쥘 베른은 '지구에서 달까지'를 통해 거대화된 대포를 통한 우주 여행을 상상했고, 로켓방정식을 비롯한 근대 로켓 기술을 정립한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로켓과 우주 개발에 대한 여러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우주로 가는 황금열쇠가 된 V2 로켓

 

그렇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가시권에 들어온 것은 엉뚱하게도 망할 콧수염, 아돌프 히틀러 때문입니다. 나치 독일은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를 비롯하여 서유럽의 제공권을 잃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여러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것이 보복병기(Vergeltungswaffe), 즉 V 시리즈 무기였는데, V1은 지금의 순항 미사일의 뿌리가 되고 V2는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이 됩니다. V3도 있지만 이건 그냥 방향 고정식 초대형 대포고,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제럴드 불이라는 사람이 추가 연구(이걸로 우주까지 나갈 생각도 했습니다.)하다 이스라엘로 추정되는 세력에 암살당했습니다. 

 

소련 로켓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

 

이 가운데 V2는 당시에는 효과 자체는 적었어도 그 가치에 대해서는 미국과 소련 모두 주목했는데, 전쟁이 끝난 이후 나치 독일의 V2 개발 인력들을 미국과 소련 모두 경쟁적으로 데려가게 됩니다. 특히 소련이 이 부분에서는 한 발 먼저 앞서가는데, 소련은 V2의 핵심 개발자들은 그리 확보하지 못했지만 대신 소련에는 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인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관련 연구를 하던 코롤료프는 V2 생산에 관련된 엔지니어들의 도움을 받아 소련에서 필요로한 실제 로켓 생산에 필요한 노하우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 결과 V2의 소련판 복제인 R1 로켓을 비롯한 R 시리즈 로켓을 개발하면서 우주에 대한 꿈을 키워갑니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우주에 대한 로망은 개뿔, 다 이런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 모두 '우주에 대한 꿈'은 정치인들에게 없었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자들의 꿈일 뿐이었습니다. 정치인과 군인들은 '소련과 미국에 핵폭탄을 안전하게 날릴 수 있는 무기'로서 로켓을 바라봤고, 실제로 이들 로켓의 개발 목적은 바로 '탄도탄'이었습니다. 소련은 1949년에 핵개발을 성공하지만, 소련의 국력으로는 미국에 핵폭탄을 실은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보내기 어려웠기에 이를 보충할 목적으로 탄도탄, 정확히는 대륙간 탄도탄(ICBM) 개발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탄 R-7이 1957년에 태어납니다.

 

공산주의자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정치인들은 무기로서의 로켓을 원했지만 과학자였던 코롤료프는 늘 우주를 꿈꿨습니다. 처음에는 '네가 시베리아행 열차를 타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하며 이러한 제안은 무시당했지만, R-7 개발이 궤도를 타면서 말발이 먹히게 된 코롤료프의 인공위성 개발 제안이 겨우 통과됩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기능을 넣으려 했으나 시간도 없고 너무 무겁기도 하여 정말 단순한 기능 하나만 넣어서 58cm짜리 구형 인공위성을 만듭니다. 이 위성은 1957년 10월 4일에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스푸트니크 1호'입니다.

 

 

이 뉴스는 바로 미국을 'Rock'시켰습니다. 위의 프레디 머큐리 공연처럼 '즐거운 Rock'이 아닌 '공포의 Rock'이지만 말입니다. 보통 무기 개발은 조용히 하는 법이기에 쉽게 알 수 없지만, 아예 공개된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성공은 미국에서 '소련에서 ICBM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로 바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제 소련은 미국 방공망을 뚫고 핵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니 미국에서 난리가 안 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푸트니크 쇼크'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미국도 V2 개발자들을 빼내갔다고 했는데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예. 열심히 삽을 푸고 있었습니다.

 

우주를 위해서라면 나치즘에도, 자본주의에도 충성할 수 있다~

 

미국은 V2 개발 책임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여러 인력을 확보했지만 정작 이들을 찬밥 대접했습니다. 소련도 독일계 기술자들을 월급을 많이 주는 것 말고는 제대로 대우하지 않고 기술 습득 이후에는 아예 '팽'시켰지만 미국은 그 보다도 못했습니다. 그냥 이들을 '월급루팡'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제리(독일인의 멸칭)들의 손을 안 빌리고 미국인의 손으로 로켓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집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국가적으로 컨트롤을 하지 않고 육군과 해군이 따로 개발하며 더욱 삽을 펐습니다. 폰 브라운은 육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레드스톤 로켓이라는 탄도탄을 이미 성공적으로 개발했습니다.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1957년 7월에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문제는 저 똥고집을 부린 결과 해군이 삽질하며 개발하던 뱅가드 로켓을 발사체로 삼은 것입니다.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서두른 것은 미국이 이미 인공위성 발사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는데, 정말 급히 준비했지만 제대로 성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도 빼았겼고 망신도 당합니다. 뒤통수를 맞고서야 서둘러 같은 해 12월 6일에 최초의 미국산 인공위성인 뱅가드 TV 3호를 발사했는데...

 

뽜이야~

 

이렇게 정말 제대로 망신을 당합니다

 

정말 1m 올라가고 폭발했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따로 없죠. 다음해 2월에는 뱅가드 TV 3BU라는 이름의 2차 발사를 하지만 이번에는 날아가던 중 1분만에 폭발해버립니다. 망신망신개망신...이 따로 없는 일입니다. 그나마 이 해 1월에 폰 브라운 중심의 육군에서 레드스톤 로켓을 개량해 익스플로러 1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올렸지만 '제리들의 손을 빌려서 겨우 성공했다'는 자존심에 대한 상처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NASA, 태어나다

 

이 꼴을 보다 못한 미국 정부는 우주 개발을 전체적으로 진행할 통합 기구를 만드는데, 그 몸체가 기존에 항공 기술을 연구하던 국책기관인 NCAA(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였고, 이를 1958년 10월에 NASA(미국 항공우주국)으로 확대 개편하고 각 군의 로켓 관련 기술과 인원을 전부 인수합니다. 베르너 폰 브라운도 이 때 초기 연구 단계였던 차세대 로켓인 새턴 로켓을 NASA에서 개발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NASA로 이적했는데, 폰 브라운 역시 코롤료프와 마찬가지로 무기에 환장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닌 우주를 바라보던 사람이었기에 이런 조건을 건 것입니다. 

 

아, 지구는 푸른거 맞다니까요

 

하지만 미국의 망신은 스푸트니크 1호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공위성이 올라갔다는 것은 사람도 우주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당연히 미국과 소련 모두 그 다음은 사람을 우주 궤도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스푸트니크를 성공시키며 발언권이 더 세진 코롤료프는 이 다음 단계인 보스토크 계획을 세워서 1959년부터 소련군 공군의 우수한 파일럿들을 후보로 데려와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고, 1957년 11월에 스푸트니크 2호를 탄 견공 라이카를 거쳐 데이터를 쌓아 결국 1961년 4월 12일에 유리 가가린이 우주 궤도를 볼며 '지구는 푸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번에도 미국은 소련에게 뒤쳐졌습니다. 기술면에서도 소련이 조금 더 앞서 있기도 했으나 미국은 우주 개발 계획 일정을 일반에 어느 정도 공개했지만 소련은 이를 비밀에 부쳤기에 미국의 계획에 맞춰서 초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NASA 우주인단 1기 'The Mercury 7'

 

미국도 소련의 보스토크 계획과 비슷한 시기에 '머큐리 계획'이라는 이름의 유인 우주 비행 계획을 세웠고, 이를 위해 공군과 해군의 엘리트(테스트 파일럿 경력이 있는 석사 이상 학력자)를 모아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들이 총 7명이라 '머큐리 세븐'으로 불렸는데, '럭키 세븐' 효과를 노려 뽑은 것입니다. NASA에서는 나름 계획을 세워서 일단 로켓(일단 레드스톤 중거리 로켓을 쓰되 본격적인 비행은 미국산 ICBM인 아틀라스를 이용해 진행) 테스트도 하고 무인 및 동물 실험 등 시험 발사 계획도 차곡차곡 쌓아서 사람을 올릴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을 알고 초를 친 소련의 행보에 그야말로 NASA는 '너희는 다들 식충이냐!'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엉덩이에 불이 붙은 NASA는 레드스톤 로켓에 머큐리 세븐의 일원인 앨런 셰퍼드를 태워 1961년 5월 5일에 프리덤 7을 발사합니다. 이 자체는 커다란 문제 없이 성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미국은 다시 한 번 자존심에 치명타를 먹었습니다. 유리 가가린은 제대로 된 궤도를 돌고 왔는데, 앨런 셰퍼드는 그냥 우주 맛만 본, 탄도 비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ICBM이 아닌 레드스톤 로켓의 근본적인 성능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같은해 7월에는 거스 그리섬이 리버티 벨 7을 타고 똑같이 탄도 비행을 했고, 소련과 같은 궤도 비행은 본격적인 아틀라스 로켓을 사용한 1962년 2월의 존 글렌이 탄 '프렌드십 7'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 비행을 통해 존 글렌은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NASA 퇴직 후 정계에 진출해 상원의원이 됩니다. 덤으로 미국인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앨런 셰퍼드는 그야말로 잊혀졌는데, 이 이야기도 뒤에 적습니다.

 

 

 

연달아 소련에 물을 먹은 미국 입장에서 이제 우주 개발은 더 이상 '돈 문제'가 아닌 '또 하나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 비행을 할 때 초짜 대통령이었던 JFK는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이기기 위한 방안을 NASA에 요구했고 이에 폰 브라운이 내놓은 답은 '미국인을 달에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폰 브라운은 처음부터 달 탐사를 목표로 삼았고, 그가 NASA로 이적하는 조건이었던 새턴 로켓 역시 최종 목표는 달, 그리고 화성까지 가는 것이었습니다. JFK는 고민 끝에 방법이 그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결국 1961년 4월에 5월에 미국 의회에서 한 연설로 '10년 이내에 인간을 달로 보냈다 귀환시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밝히고, 다음해 9월 12일에는 라이스 대학교에서 그 유명한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연설을 합니다. 위의 영상이 그 연설인데,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라는 내용이 미국이 소련을 우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이것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NASA 우주 경쟁을 이끈 제임스 웹, 그는 죽어서 우주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이 발표를 기점으로 NASA는 난리가 났습니다. 그 전까지는 죽어라 갈굼을 당하는 존재였던 NASA는 JFK의 한 마디에 그야말로 국가의 명운을 짊어진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NASA 국장인 제임스 웹(제임스 웹 망원경의 그 사람입니다.)을 포함해 NASA의 간부진들은 '우릴 죽여라, 죽여!'하면서 좌절했는데, 그 정도로 인류를 달에 보내는 것은 상당한 돈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시간이었으니 이렇게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평직원들과 하급 간부들은 '대통령이 밀어주는데 한 번 힘내보자'며 긍정적인 입장이었지만 그만큼 이건 앞이 안 보이는 문제였습니다. 

 

제미니 우주선. 이 때 미국은 '달 올인'을 외치며 비난에 귀를 막고 기술 습득에만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질렀으면 NASA는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NASA의 모든 계획은 이제 인간의 달 탐사에 올인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NASA의 우주 개발 계획은 머큐리 계획같은 '보여주기식'이 아닌 '인간을 달로 보내기 위한 실용적인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먼저 사람을 달로 보내기 위해 필요한 여러 기술을 검증하고 경험을 쌓기 위한 계획인 제미니 계획이 1961년부터 이뤄졌습니다. 그렇지만 제미니 계획으로 사람을 우주로 올려보낼 때 까지는 4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그 사이에 미국 국민들은 '소련에 뒤쳐진다'며 아우성을 쳤습니다. 더군다나 제미니 계획의 첫 번째 유인 발사인 제미니 3호 직전에 또 소련은 보스호드 2호를 발사해 초를 쳤습니다. 이 보스호드 2호는 미국도 하지 못한 우주 유영(EVA)을 성공시켰으니 미국 국민들은 더 NASA를 볶을 수 밖에 없었죠.

 

아폴로 8호가 남긴 최고의 유산, 지구돋이(Earthrise)

 

그럼에도 NASA의 임직원들은 미리 정해 놓은 스케줄에 맞춰 제미니 계획을 진행시켰고, 이에 필요한 여러 기술(EVA, 도킹 등)을 검증하는 데 집중하며 뚝심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기술 습득과 증명이 끝나자 바로 본격적인 계획, 즉 아폴로 계획을 발동합니다. 나중에 아폴로 1호로 명명된 지상의 불운한 사고도 있었으나 본격적인 유인 비행인 아폴로 7호를 시작으로 달을 한 바퀴 돌고 온 아폴로 8호, 달착륙선(LM) 관련 테스트를 진행한 아폴로 9호, 달 착륙을 뺀 모든 것을 성공리에 진행한 아폴로 10호 등 미국은 흔들림 없이 움직였습니다.

 

장수만세, 소유즈 우주선

 

반대로 소련이 이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보스토크, 보스호드 계획은 그런대로 성공하여 미국에게 제대로 엿을 먹였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것은 당시 소련 국력으로는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달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이미 다 공개되어 있기에 소련 역시 소유즈 계획을 포함한 여러 달 탐사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잘 써먹고 있는 소유즈 우주선이 처음에는 달탐사용으로 개발된 것입니다. 소유즈 우주선 자체는 사고는 없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개발이 진척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N1 로켓입니다. 크고 아름답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로켓이 탈을 일으켰습니다. 지구 궤도 정도를 올라가는 것은 기존의 R7 로켓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달로 가기 위해서는 훨씬 크고 강한 로켓이 필요했습니다. 코롤료프는 N1이라는 이름의 로켓을 개발했는데, 문제는 소련의 국력에서 초 고출력 로켓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작은 로켓(엔진)을 30개 달아서 출력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미국의 새턴 로켓은 F-1이라 불리는 엔진 5개만으로 이 출력을 감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물량 대결'을 펼치려 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엔진을 동시에 정확히 제어하는 것이 어려우며,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로켓 전체가 그야말로 공중분해 쇼를 벌인다는 것인데 소련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미국이 뱅가드 로켓에서 벌인 삽질을 그대로 벌입니다.산소 탱크가 폭발해서 우주 생존극을 펼친 아폴로 13호도 발사 중 진동으로 가운데 엔진이 먼저 꺼져 미션 중단을 고민해야 했는데, 그나마 방향에 영향을 주지 않는 5번 엔진이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다면 바로 미션 중단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1959년부터 개발을 시작한 로켓이 아폴로 11호 발사 직전까지도 제대로 된 테스트를 하지 못했는데, 그 사이에도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달 착륙에 올인한 미국과 달리 소련은 이런저런 우주 개발을 치적을 위해 해야만 하여 인력과 예산을 집중하지 못했고, 1964년에는 니키타 흐르쇼프가 실각하고 송충이 눈썹으로 유명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집권합니다. 브레즈네프는 흐르쇼프보다는 더 깐깐하게 우주 개발 예산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N1 개발진 안에서도 불화가 생겨 소련 최고의 엔진 전문가가 계획에서 빠져 나갔으며, 그 코롤료프조차 1966년에 의료사고로 사망하며 계획이 공중에 떠버리고 맙니다. 

 

 

어찌저찌 개발을 완료하여 1969년 2월에 첫 발사를 했지만 발사 1분만에 폭발 엔딩을 기록합니다. 7월에 2차 발사를 했으나 이번에는 200m를 올라가서 폭발. 이 폭발은 하필 발사장까지도 피해를 입혀서 추가 시험을 당분간 못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아폴로 11호가 올라가서 달에는 미국인의 발자국이 새겨집니다. 이후에도 두 번 더 시험 발사를 했으나 모두 폭발했습니다. 더 이상 N1 로켓은 새로 제작되지 않았으며 기술 개발은 계속 진행되었으나 1976년 결국 이 계획을 중단하고 맙니다.

 

이렇게 미국은 달 탐사라는 중대한 대결에서 소련을 이깁니다. 그리고 이겼더니 아폴로 계획의 생명도 끝이 납니다. 아폴로 계획은 그야말로 돈 먹는 하마였는데, 아폴로 11호를 통해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최종 승자가 되자 미국 안에서도 더 이상의 아폴로 계획 진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특히 미국 의회가 그랬는데, 그 돈으로 사회 복지나 다른 군사 개발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미 계획하고 있던 계획 가운데 아폴로 17호까지만 진행을 하고 이후 계획은 중단. 이렇게 인간은 수십년간 달을 밟지 못했고 무인 탐사에 의존해야만 했습니다.

 

화투장이 이란을 두들겨 패는 명분도 핵과 탄도탄이 조합되면 이걸 기본적으로 막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주 개발은 대륙간 탄도탄에 대한 공포를 통해 지지를 얻었고, 그 기술 역시 대륙간 탄도탄 개발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많습니다. 어린이날이니 당연히 평화를 바래야 하지만, 세상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주를 향하는 길은 피와 파괴의 길과 일맥상통한 현실...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보길 바라는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추신: 위에서 하다 말았던 불쌍한 앨런 셰퍼드 이야기를 하면...

 

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앨런 셰퍼드의 인생이여...

 

앨런 셰퍼드는 분명히 미국 최초로 '우주'를 갔다 온 사람이기에 당연히 처음에는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주 비행사들은 그야말로 스타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탄도 비행'이라는 사실은 NASA에서도, 정치권에서도, 국민들도 알고 있었던 사항이기에 진짜 '궤도'를 돌고 온 존 글렌이 나오자 앨런 셰퍼드는 그야말로 '듣보잡'으로 전락합니다.

 

여기에 더해 개인적으로 불행도 있었는데, 원래 제미니 계획에서도 셰퍼드가 가장 먼저 우주에 올라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어리럼증을 비롯한 몸에 문제가 나타났는데, 메니에르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비행 자격부터 박탈되기에 우주에는 더욱 나갈 수도 없죠. 이제 군대로 돌아가봐야 지상직만 전전하다 퇴역할게 뻔했는데, 당시로서는 '불쌍한 베테랑의 명예직'이나 다름 없는 수석 우주비행사 자리에 취임합니다. 전임 수석 우주비행사는 똑같이 머큐리 세븐이었지만 아예 우주에 올라가지도 못한 디크 슬레이튼이었는데, 슬레이튼 역시 우주로 가기 직전에 부정맥으로 똑같이 비행 자격을 박탈당했는데, 그를 잡기 위해 NASA에서 만든 임시직이 수석 우주비행사였습니다. 슬레이튼이 더 상급 직책인 승무원 담당 디렉터가 되면서 셰퍼드가 그 뒤를 이은 것입니다.

 

이름대로 수석 우주비행사는 우주비행사들의 선임자로서 이들을 대표하지만 저 당시에는 이러한 것 보다는 NASA를 홍보하는 홍보 책임자로서의 역할이 더 컸습니다. 앨런 셰퍼드를 홍보 책임자로 서술하는 경우가 이 때문입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미국인들의 머리 속에는 '최초의 미국인 우주비행사 = 존 글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꼭 나쁜 방향으로만 굴러가지는 않습니다. 셰퍼드의 메니에르병이 나은 것입니다. 물론 자연 치유는 아니고 림프강 감압술이라는 수술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 수술은 당시로서는 꽤 최신 치료법이라 위험성도 있었습니다만 수술은 성공했고, 1969년에는 비행 자격도 다시 회복했습니다. 이미 아폴로 계획은 궤도를 타고 있었지만 아직 그의 우주에 대한 꿈은 끝난게 아닙니다. 

 

원래 아폴로 13호를 그가 탈 예정이었으나 상급자가 된 디크 슬레이튼이 훈련 부족을 이유로 14호로 이들을 미루게 됩니다. 13호는 후배인 짐 러블이 탔는데, 이 아폴로 13호는 시작부터 삐걱거리더니 그야말로 우주 서바이벌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위기를 참 우연히 피한 셰퍼드는 '생초짜 트리오'를 구성해 달에 착륙했고, 우주에서 골프를 친 세계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주 경쟁에 헌신했기에 원래 속했던 해군에서 소장 계급을 달아주며 제독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또 한명의 의지의 우주인, 디크 슬레이튼(사진 앞줄 왼쪽)

 

참고로 마지막으로 불쌍한 디크 슬레이튼은... 술담배도 끊고 운동에 식생활까지 바꾸며 몸의 건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심장이 제대로 돌아와 비행 자격을 회복했습니다. 이 때가 늦어져 아폴로 계획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아폴로 계획의 잔재라 할 수 있는 아폴로-소유즈 프로젝트를 통해 우주를 향한 꿈을 결국 이뤘습니다.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르는 어린이 여러분, 꿈은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