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길을 가면 되도 않는 부정선거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무나 중국인이라 갖다 붙이는 멍멍 사운드가 많이 보이는데, 정말 윤가놈 공무원증을 파쇄한 다음 내란죄로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라 보기에 오늘 주제가 중국, 당시로서는 중공과 관련된 것이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올립니다. 어차피 중국, 아니 중공을 빨아주는 이야기도 아니라서 말입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부카니스탄은 더 말할 것도 없고 2세계의 종주국인 소련, 그리고 No.2인 중국, 아니 당시 명칭으로는 중공은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지의 국가였습니다. 이 부분은 서방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중공을 무슨 신비로운 나라로 생각한 사람들도 꽤 있었죠.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서방에서도 꽤 나타난게 이 때문인데, 물론 뚜껑을 열어보니 중공도 소련과 별반 안 다르고, 마오쩌둥은 모략 만렙이기는 해도 지도자로는 별로라는게 드러났지만 그 때는 이런 판단 재료 자체가 없어서 일방적으로 오픈하는 정보만 갖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죠.
이러한 중공 시절(?) 중국의 폐쇄 정책을 일명 '죽의 장막'이라고 부르는데, 그래서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중공은 빨갱이들이라고 욕은 하지만 도대체 이 사람들이 뭔 생각을 갖고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는 나름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도 제대로 모르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6.25 당시에는 교전국이기도 하기에 대한민국과 수교는 커녕 최소한의 외교적인 소통조차 없었습니다. 이런 죽의 장막이 우연히 풀린 사건이 있었는데, 그 빗장도 우리가 뚫은게 아니라 중공에서 연 것입니다. 그것도 똥줄이 타서 말입니다.
당시에는 '중공 민항기 불시착 사건'으로 불렀고 지금은 '중국민항 296편 납치 사건'으로 부르는 이 사건은 1983년 5월에 벌어졌습니다. 예. 지금 부르는 명칭으로 보면 사건이 뭔지 바로 드러나는데, '하이재킹'입니다. 대한민국 국적기가 하이재킹에 휘말린 것은 1971년에 벌어진 대한항공 F27 납치 미수 사건이 마지막이었지만 이 땅에서 벌어진 하이재킹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아, 영화로도 나온 F27 납치 미수 사건 내용은...
되짚어 보는 대한뉴스(42) - 하이재킹을 몸으로 막다, KAL F27 납북미수
작년에 개봉한 우리나라 영화 가운데 '하이재킹'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UBD 단위로 망한건 아니지만 본전을 건질 정도로 흥행하지는 못했고 '고증은 잘 했는데 재현은 잘하지 못했다'는 좀 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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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이 사건 이전까지 중공과 대한민국이 관련된 사건이 전무했던 것은 아닙니다. 무려 그 전까지 인민해방군 군인이 대한민국에 망명(귀순)하겠다고 한 사례가 6건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나라 정부는 중공측에 이 문제 처리를 위한 회담을 요구했지만 죽의 장막 너머에서는 아예 반응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전투기까지 몰고 망명한 사람에 대해 최소한 전투기는 반납하겠다고 했음에도 그 조차 무시할 정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민간 차원의 무역 등은 소규모로 하고 있었지만 이 조차 중공측에서 부카니스탄을 생각해 딴지를 많이 걸고 있어 규모가 미미했습니다.
중공측은 과거부터 외교 관련 협상의 전제 조건으로 하나의 중국, 즉 대만(당시 명칭 자유중국)과 단교할 것을 요구했는데, 당시로서는 이는 멍멍이 사운드 그 자체라서 들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전쟁까지 벌였고 현재는 제대로 된 정보도 없으며 빨갱이(?)인 나라와, 기존에 잘 외교 관계를 맺던 나라와 단교하고 외교 관계를 트려는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질 이유가 없죠. 중공측이 이렇게나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다보니 1980년대 초반에는 차라리 소련과 외교 관계를 맺는게 더 낫겠다는 움직임이 나왔고, 대한민국과 소련 사이에는 고위층간 접촉은 없어도 그나마 실무진간에는 조금씩 교류의 장이 열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한 중공의 고압적인 자세가 한 방에 무너진 것이 바로 이 296편 납치 사건이었습니다. 1983년 5월 5일 선양에서 출발해 상하이로 가던 이 항공기(호커-시들리 트라이던트)는 대만으로 망명하고자 하는 6인조 납치범에 의해 조종실이 제압당했고, 대만으로 기수를 돌리라는 협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질 때 적성국이 아닌 최대한 국내나 최소한 우방국으로 가면서 납치범들을 속이려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조종사들은 부카니스탄 평양(순안)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평양에 다 와서 착륙을 하려 했으나 납치범들은 구름 아래 풍경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답지 않은' 것을 보고 '동작그만'을 외쳤습니다. 조종사들은 다시 대만쪽으로 가라는 협박에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는데, 부카니스탄의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있죠.
사실 이 납치 사건 발생 시점부터 대한민국 국군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은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평양 근처에서 맴도는 정체 불명 기체를 확인했고(웃기게도 부카니스탄은 296편의 영공 침입 자체를 몰랐습니다.) 그 기체가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사건이 터졌음을 파악했습니다. 당연히 스크램블을 걸고 F-4와 F-5로 구성된 편대가 휴전선 근처에서 대기하다 이 기체를 확인하고 유도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청주공항으로 유도할 생각이었으나 296편이 이를 무시하고 춘천의 미군 기지, 캠프 페이지(춘천역 옆에 있는데, 지금은 폐쇄되어 먼 훗날 언젠가 공원을 만들 예정입니다.)에 착륙했습니다. 나중에 연료가 없어서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지만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알 수 없었죠. 캠프 페이지는 중대형 여객기가 착륙할 정도로 큰 공항이 아니라서 활주로를 넘어 오버런까지 한 정말 위험한 착륙이었습니다.
정체 불명의 항공기가 북한쪽에서 대한민국으로 날아 왔는데 대한민국이 평온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어린이날에 난데 없이 공습경보가 울리고 '연습이 아니다'라는 방송이 울려 퍼지며 전국이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여객기가 착륙한 춘천에서는 전투기까지 날아 다니니 전쟁 났다고 더 난리였죠.T_T

하여간 여객기는 땅에 내렸고, 다행히도 기내 인질극은 벌어지지 않고 인질범들은 나름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대만은 아니지만 대만의 우방국인 대한민국이니 자기들을 험하게 다루지는 않을거라 본 것입니다. 반대로 승객들은 국내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국내 유명 관광지와 산업 시설 투어를 했는데, 당시 중공 상황상 여객기를 탈 정도면 어느 정도 계급이 높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서 환대를 해주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중공에 알릴 수도 있고 죽의 장막도 좀 내려갈 수 있을까 기대한 것도 컸습니다.
하지만 중공의 반응은 대한민국 외교 당국자들의 예상을 훨씬 넘어 만만디가 아닌 미그-23의 속도였습니다. 당장 사건 발생 오후에 대한민국 정부측에 중공에서 접촉 연락이 왔는데, 중공측에서 의도적으로 대한민국 외교 채널과 접촉을 거부하다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연락할 수단도 없어서 정말 돌고 돌아서 연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민용항공국(중국 정부의 항공 정책 관할 부서) 담당자가 우연히 대한민국 정부 관계자 명함을 받아 놓은 것으로, 그것도 일본을 거쳐 접촉한 것이며 이 때 받은 팩스 전문이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의 최초의 외교 문서로 불립니다.

이후 과정도 정말 번개처럼 이뤄졌는데, 5월 6일에 중공측에서 협상 대표단을 다시 다음날인 7일에 보낸다는 전문을 보냈고, 이를 우리나라에서 7일 오전에 공식화함으로서 협상의 장이 열립니다. 실제로 7일 오후에 중공측 협상단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30명이 넘는 대규모 협상단은 명함은 민용항공국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외교, 정보, 언론 등 타 기관 관계자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말 중공측에서는 어떻게든 협상을 성공시키겠다고 작정하고 왔던 셈입니다.
물론 전쟁 이후 처음 외교의 장에 선 두 나라가 바로 화기애애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중공측에서는 남조선이라 부르며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고, 어차피 불리한건 중공측이라 우리 정부는 '똥줄 타는건 당신네인데 예의 좀 지키지'라는 배짱을 부렸습니다. 이에 중공측에서도 꼬리를 내려 서로를 공식적인 국호로 부르고 국기도 협상장에 내거는 국가 대 국가간 협상으로 이뤄졌습니다. 죽의 장막을 치던 중공의 기존 자세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사실 하이재킹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무사히 돌려 보내는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부카니스탄같은 막 나가는 나라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본주의 진영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전부는 아닙니다.) 이 원칙은 지켜졌기에 이 부분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납치범들에 대한 처리가 문제였습니다. 사실 하이재킹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1970년에 '항공기의 불법납치 억제를 위한 협약', 일명 헤이그협약이 생겼고 대한민국도 비준한 협약입니다. 이 협약에는 납치범을 사건 발생 당사국(즉 대한민국)의 법률로 엄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문제는 이게 공산주의 진영에서 자본주의 진영으로 망명할 목적으로 벌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정말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대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꼭 그러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협상은 3일을 갔으나 어차피 급한 것은 중공측. 우리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여 아래와 같은 원칙으로 협상을 마무리 짓고 양국 대표인 공로명 차관보(YS 정권 외무부장관)와 선투 민용항공국 국장의 이름으로 합의문을 작성했습니다. 중공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비공식적인 채널의 이야기이나 승객 가운데 미사일 전문가가 타고 있어서라는 믿거나 말거나성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 승객, 승무원, 항공기를 조속히 송환한다. - 부상을 당한 사람은 국내에서 치료를 한 뒤 여행이 가능해질 정도로 회복한 뒤 송환한다. - 납치범은 대한민국 법률에 의해 처벌한다. - 앞으로 두 나라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번 사건을 참고하여 처리하자. |
이렇게 정리는 되었지만 사실 이 뒤에도 좀 이야기 거리는 있습니다.
- 살인마 전대머리는 이 납치 사건에 대한 컨트롤 타워를 안기부가 맡도록 했습니다. 원래는 군에서 직접 사건을 맡으려 했으나 미군도 엮여 있어 기껏해야 야전군 정도의 차원에서 바로 어찌 하기도 어려운데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닌 외교 문제에 가깝다보니 외교관 출신이자 정보통이었던 당시 노신영 안기부 부장이 총괄하는 것이 예측 불가의 사고가 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판단은 나름 정확했는데, 당시 하나회가 쫙 깔린 군부에서는 결정에 불만이 많았지만 하나회의 수장이자 국민을 상대로 학살도 벌이고 유수의 재벌도 돈을 덜 바쳤다고 날려버리는 전대머리가 아래 사람에 불과한 하나회 군인들의 반발에 가만 있을 사람인지요. 결국 군부는 그냥 깨갱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해프닝도 5공화국 시절 안기부가 너무 힘이 세고 당시에 안보에 대한 민군 통합 컨트롤 타워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라 지금은 그냥 국가안보실장이 맡으면 되는 일입니다.
- 위에 적은 헤이그 협약에 의해 납치범들은 강하게 처벌을 해야 합니다. 현재의 법률을 기준으로 하면 그냥 최소가 7년 이상 징역에 사상자가 나오면 사형까지 형량이 올라가는 범죄가 하이재킹입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상 처벌을 강하게 하기는 어려웠는데, 이들은 최대 6년의 징역형이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형량을 선고받고 이 조차 다 살지 않고 1년만에 가석방한 뒤 강제추방 형식으로 대만으로 떠났습니다. 중공측도 사실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급한건 그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죠. 실제로 일부 정치권에서는 이들 납치범을 칭송하며 이런 형식적인 처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으나, 나름 개념 있는(?) 나라에서 국제적인 조약을 대놓고 무시하긴 어렵기도 했습니다.
다만 대만으로 간 이들이 행복했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산 사람도 있지만 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는 생활고와 대만 사회에 대한 불만이 겹치며 납치 살인 사건을 일으켜 사형당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대만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는지 이후에는 전투기를 몰고 귀순하면 받아주지만 민항기를 하이재킹해 귀순하면 범죄자로 취급해 처벌한 뒤 중국으로 송환하는 법률을 만들었습니다.
- 사람이야 그냥 다른 비행기 타고 가면 되지만, 캠프 페이지에 착륙한 296편은 중공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군 공항이라 활주로가 짧아 최대 허용 이륙중량이 극히 낮았는데, 캠프 페이지 끝에서 끝까지 해봐야 1.5km 정도에 불과합니다. 활주로 길이가 비슷한 지금 건설중인 울릉도 공항도 겨우 70인승 들어가는 것도 위험하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3발기는 정말 무리죠. 그래서 떼 낼 수 있는 것은 의자부터 화장실 변기까지 다 떼내어 최대 허용 이륙중량을 간신히 맞춰서 이륙만 한 뒤 김포공항으로 갔고, 여기에서 다시 떼낸 부품을 재장착하여 중공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추락을 대비해 캠프 페이지 주변 주민을 다 대피시키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과 중공, 미래의 중국 사이의 죽의 장막에 살짝 구멍이 뚫리게 되었는데, 위에 적은 소규모 무역 역시 다음 해부터 제한이 많이 풀려 수출액이 큰 폭으로 늘었습니다. 또한 우리 정부의 대처에 대한 화답성으로 중공은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에 공산권에서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습니다. 올림픽은 소련도 참가했지만, 아시안게임은 아시아에 넘쳐나는 다른 공산권 국가는 한 나라도 참가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선심에 대한 중공측의 화답이라 볼 수 있습니다.
추가로 2년 뒤 우리나라와 중공은 또 한 번 비슷한 상황을 겪는데, 1985년에 인민해방군 어뢰정이 함상 반란을 일으켜 대만으로 가려다 표류해 우리나라 영해로 들어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이 어뢰정을 추격해 온 중공 해군이 우리 영해를 침범하면서 양국 군이 서로 대치하는 위기까지 겪었지만 영해 침범에 중공측이 '사과'하면서 사건이 원활히 종결되었습니다. 외교적으로 '사과'라는 말은 함부로 나올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말 중공측이 쫙 엎드린 셈이었습니다. 이 시기부터는 우리도, 중공도 슬슬 외교 관계를 본격적으로 가져야 하지 않겠냐는 검토를 하고 있었기에 사건을 키우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다만 부상자만 나온 2년 전 하이재킹과 달리 이번에는 살인까지 저지른 함상 반란이었고, 함상 반란은 역사적으로도 어느 나라건 예외 없이 칼같이 처벌하는 중범죄라서(농담이 아니라 영국은 18세기에도 함상 반란을 일으킨 자를 지구 끝까지 추적했습니다.) 우리쪽도 범인들을 순순히 망명시켜줄 수는 없었기에 전부 중공측으로 송환시켰고 이들의 운명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실제 중공, 아니 중국과의 수교는 여기에서도 몇 년 더 걸렸지만 이 두 사건이 두 나라 사이의 죽의 장막을 걷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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