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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 업을 짊어진, 업보에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

dolf 2023. 8. 16. 13:00

 

극장에 직접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1년에 한두번쯤인데, 보통 개봉 전에 '느낌'이 바로 오는 것들을 고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 오는 영화들은 대체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국내 개봉 일정이 정해진 이 영화 역시 그러했고, 국내 극장들에서 예약을 받자마자 바로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IMAX 전용이라서 집에서 가까운 CGV 강변은 이 영화를 개봉하지 않고, 용산이나 압구정까지 가야 했습니다. 용산이 IMAX 성지라 하지만 거의 대부분 시간대에서 전멸하였기에 부득이하게 눈꼽만한(?) CGV 압구정으로 가서 보고 왔습니다. 한 손에는 탄산, 한 손에는 생수를 들고 말입니다.^^


■ 먼저 문제점부터...

사실 이 영화는 전기영화라고 하지만 전기영화라는 관점에서는 꽤나 난잡합니다. 일반적인 흐름, 오펜하이머 청문회, 스트로스 청문회 장면이 교차되는데다, 전체 시간 배분 가운데 1/3 정도를 오펜하이머 본인이 안 나오는 스트로스 청문회가 차지하고 있어서 주인공이 1/3쯤 안 비치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펜하이머라는 개인의 일대기 전체를 보는 영화라 생각하셨다면 좀 실망스럽습니다.

또한 3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썼음에도 초반에 관객들의 눈을 끄는 빌드업이 좀 약하고 난잡한 면도 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어떻게 미국의 양자역학의 선구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강렬한 카리스마성을 갖게 되었는지가 좀 많이 생략됩니다. 미국 양자역학의 선구자가 된 것은 유학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을 만나는 형식으로 보여주며, 카리스마성도 처음에 한 명 뿐이던 학생이 점차 늘어나는 식으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예 하나의 학벌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의 카리스마성을 보여주기는 너무 약하고, 이 초반은 오히려 유학기간 중 오펜하이머의 심리적 불안정 묘사에 더 집중되는 모습이기에 좀 생뚱맞기도 합니다.

전기영화의 특성상 비주얼의 강렬함이 약한 것 역시 화려함을 즐기는 분들의 눈에는 차지 않습니다. 그나마 언론 등을 통해 가장 볼만한 장면으로 평가받는 트리니티 핵실험 장면도 기대를 크게 가지면 좀 실망스럽습니다. 한 방에 멋지게 터트리는 영상미가 아니라 몇 분에 걸쳐 불이 타오르는 여러 장면을 보여주는 형태이기에 다큐멘터리의 불꽃 장면을 보는 느낌에 더 가깝습니다. 위에 올린 1차 포스터처럼 폭☆8하는 모습이 강렬하고 끝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적으며, 이거 하나 보러 가실거면 영상은 좀 실망할 것입니다. 또한 핵실험 이외의 히로시마/나가사키 폭탄 사용 장면 등은 전혀 안 나오며 라디오 연설 형태로만 짤막하게 나옵니다. 사실 이게 핵심은 아니까요.

그 이외에 개인적으로 불만을 가진 점은 R 등급을 받게 한 검열삭제 장면입니다. 이게 '난봉꾼 오펜하이머'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는 합니다만, 두 번 나오는 이 장면(정확히는 한 번은 제대로 할 걸 다 하고, 나머지 한 번은 그냥 정사 후 대화로)은  서사면에서 안 넣는게 낫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좀 생뚱맞습니다. 비주얼면에서도 그렇게 볼만한 것도 아닌데다 정말 생뚱맞게 나와서 한참 집중하던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외도 장면은 어느 정도 사실에 입각한 것이지는 하지만 대놓고 보여주는 것 보다는 다른 식의 표현이 그 앞뒤로의 몰입을 방해하지 않게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 BUT, 그러나...

그러면 이 영화는 기대에 못 미치냐구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3시간을 초 단위로 살짝 넘는 이 영화는 꽤 길지만 러닝타임이 지루하지는 않은게 나름 신기한 매력입니다. 긴 전기영화가 안 지루하기는 어렵고,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비주얼면에서 화려하거나 눈에 확 남는 자극적인 장면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사 장면은 괜히 넣었다 생각될 정도로 생뚱맞구요.

오히려 여러 리뷰에서 후반 1/3을 차지하며 기존 감동을 꺼트린다고 하는 스트로스 청문회 및 오펜하이머 청문회 장면이 더 재미있습니다. 정확히는 통쾌한게 아니라 '시추에이션에 분노가 치밀고 슬퍼지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오펜하이머를 모욕하고 두들겨 패기 위해 공정의 공자조차 나올 자리가 없는 뻔번한 비공식 청문회 장면과, 그 업보를 제대로 받는 스트로스 청문회에서의 비겁한 자기합리화와 변명은 법정 드라마급 재미를 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장르의 절반은 스릴러라고 해도 좋으며, 그래서 전기 영화로서는 좀 뭔가 이상하지만, 전기영화 절반에 스릴러 영화 절반이라고 하면 대충 맞습니다. 스릴러 영화로서는 정말 수작입니다. 그래서 극초반부의 학생 시절 부분만 좀 참으면, 뜬금없는 정사 부분만 좀 넘어가면 영화에 쉽게 빠져들게 되고 트리니티 장면까지 그냥 쓱~ 빠져들어 볼 수 있으며, 이후 장면은 법정 스릴러로 다른 각도에서 또 영화에 빠지게 만듭니다.

또한 비주얼이 생각보다 화려한 맛이 없지만 '오디오'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오디오가 생명이라 해도 좋습니다. 블루레이나 OTT로 나오면 오히려 이 부분이 약해져 재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소리때문이라도 극장에 가서 봐야 하는 영화입니다. 음악의 배치와 볼륨, 대사의 목소리 크기, 효과음의 크기까지 전부 치밀하게 계산되었다 할 정도로 상황에 딱딱 맞아 떨어집니다.

특히 트리니티 폭발 장면 자체는 기대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반대로 폭발 이후 후폭풍으로 몰려오는 사운드가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폭발 장면에는 여러 소리를 최대한 아꼈다 후폭풍이 몰려오는 그 때 소리를 한 방에 터트려 정말 핵이 터졌구나... 하는 느낌을 제대로 줍니다. 이러한 소리 효과가 없었다면 그냥 다큐멘터리의 불쇼에 불과했지만 이 후폭풍의 거대한 사운드가 트리니티 핵폭발 장면을 살려줍니다.

개봉 전부터 명배우들이 집합하면서 연기에 대한 기대가 높았고 실제로 먼저 이뤄진 북미 개봉 이후에도 이 부분은 평이 좋았는데, 실제로도 연기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 사항은 나올게 없습니다. 주연인 킬리언 머피는 굵은 연기면에서는 특별한건 없지만, 오히려 시선이나 표정, 손의 움직임 등 작은 부분에서 심리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특히 청문회 장면에서 굴욕을 참고 버티는 명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또한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로다주의 스트로스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연기었습니다. 중간에 맛이 한 번 가서 문제였고 이후 아이언맨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렇지만 괜히 로다주가 천재 배우 소리를 들은게 아니라는걸 이 영화에서 보여줍니다. 스트로스 청문회가 이 영화의 중요한 세 부분 가운데 하나이기에 비중이 킬리언 머피 다음으로 높은데, 상무장관 지명 청문회에서 자신의 악행이 조금씩 드러나면서도 그에 대해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절대 반성하지 않는 노회한 악역 정치인의 모습을 잘 소화했습니다. 마지막에 그 업보를 제대로 짊어지게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자기합리화,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는 장면은 아이언맨만 생각했다면 '저 영감탱이 뉘셈?!'이지만 그만큼 캐릭터 소화를 잘 해냈다는 의미가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노미네이트도 충분히 가능할거라 봅니다.

그 이외의 배우들은 이름값은 제대로 했습니다. 맷 데이먼의 그로브스 연기는 로다주의 스트로스 연기처럼 완전히 배우의 느낌을 지워버린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로브스 특유의 저돌성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 이외의 조역/단역들도 제 역할을 했는데, 스트로스 청문회에 빅엿을 날린 데이비드 힐 역의 라미 말렉, 오펜하이머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그의 행동이 막 나갈 때 경고를 하는 어니스트 로렌스 역의 조쉬 하트넷, 선의로 불렀는데 오펜하이머의 헛소리를 들으며 기분을 망친 트루먼 역의 게리 올드먼 등 명배우의 이름은 명불허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안 그래도 여성의 등장이 적은 영화이기는 하나 이들 역시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진 태틀록 역의 플로렌스 퓨는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경력자가 괜히 있는게 아니라는 연기를 보였습니다. 다만 하필 이 장면들이 영화의 집중을 방해하는 부분이라 배우의 연기가 좀 살아나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반대로 캐서린 오펜하이머를 연기한 에밀리 블런트는 연기파 배우의 이름을 제대로 증명했습니다. 남편의 뻔뻔한 부정 사실, 자신에 대한 간접적인 모욕, 이에 저항하지 않는 남편의 모습에 대한 분노 연기, 그리고 오펜하이머 청문회의 주요 공범이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텔러에 대한 분노 장면에서 매우 뛰어난 심리 묘사를 보였습니다.

■ 진짜 중요한 부분은...

사실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라는 겉 타이틀에 스릴러를 절반 섞은 좀 혼종(?) 영화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에서 정말로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오펜하이머 개쩔어~'도, '핵은 나빠요'도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의 대화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과학계가 이런 대접을 했듯이 오펜하이머 역시 사람들이 정점에서 끌어 내려 두들겨 팬 뒤 나중에서야 재평가를 할 것이지만 이는 실제 재평가가 아닌 두들겨 팼던 사람들의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이 작품의 주요 시간대인 1940년~50년대에는 이미 미국 과학계에서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고 있었으며 그 뒷방 늙은이에게 과학계는 나중에 상을 주며 공로를 치하했지만 실제로 대접이 달라지지는 않았으니 저렇게 말할 만 합니다.

이 영화는 성공한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쌓은 업과 그로 인하여 몰락하는 업보를 중요한 테마로 삼고 있으며,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 모두 자신이 성공 과정에서 쌓은 업 때문에 몰락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교류와 성공 과정에서 적을 쌓아온 것에 대한 업보를 받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스트로스는 개인의 자존심을 이유로 오펜하이머를 불공정한 인민재판 끝에 끌어내린 업보로 인하여 정점에서 무너졌습니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스트로스 청문회를 통해 있는대로 잔혹하고 추악해질 수 있는 인간 군상을 보여줍니다.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비공개 청문회라는 가면을 쓰고 방어권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오펜하이머를 두들겨 팬 청문회 위원들, 그리고 그 매카시즘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스스로 시체까지 능지처참했던 오펜하이머를 성자로 만들고 스트로스를 끌어 내린 미 의회 의원들의 뻔뻔함은 단순한 인과응보만이 아닌 시대에 영합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법도, 사회 정의도, 인간성도 대놓고 무시하면서 철판을 깔고 사는 잘난 위에 계신 분들의 행태를 보여줍니다. 오펜하이머는 저 청문회로 몰락한 뒤 그냥 명예직만 맡다 암으로 사망하는 업보를 받았고, 그 가족들 역시 대부분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부인은 여행 중 객사, 딸은 자살, 아들은 은둔) 스트로스는 결국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위해 오펜하이머를 몰락시키며 오펜하이머 학파를 비롯한 과학계를 적으로 돌렸고 그 결과 상무장관 낙마와 정계은퇴의 업보를 샀습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두들겨 팼던 정치권과 이에 영합한 일부 과학계(에드워드 텔러 등) 인사들은 그 업에 맞는 대가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성격적으로도 맘에 안 드는데 자신들의 생각(더욱 강한 핵무기의 보유)과 따로 놀기 시작한 오펜하이머를 매카시즘의 광풍에 힘입어 스트로스의 음모에 편승하여 묻어버린 사람들은, 5년 뒤에는 철판을 깔고 오펜하이머를 성자인양 말하며 음모에 협력한 것은 입을 닦고 스트로스를 묻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철면피 행동에 대한 반성따윈 없었으며, 그들은 스트로스를 묻었음에도 오펜하이머의 명예는 그대로 진흙탕에 담가 놓았습니다.

 

나중에 페르미상을 주기는 줬으나 어디까지나 상을 준 것이지 정치권(특히 공화당)은 이 상의 권위 훼손에 앞장서며 명예 회복을 방해했고 상을 준 케네디 정부와 민주당 역시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끌려 다녔습니다. 이렇게 매카시즘에 빠진 미국 정계와 FBI가 짜고 망가트린 오펜하이머의 명예에 대해 당사자인 미국 정부는 끝까지 침묵했고,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2022년이 되어서야 잘못을 인정하며 그제서야 사회적으로 재평가를 하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칼을 댄 사람들은... 이미 무덤 속에서 자기는 책임 없다 하며 잘 있겠죠. 또한 매카시즘 우익에 빌붙은 에드워드 텔러는 과학계(특히 오펜하이머 학파)에서는 동료를 뒤에서 칼로 찔러대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희대의 개객기로 냉대를 받았지만 정치 과학자로 미국 정관계는 좋아했고 욕먹은 만큼 오래 살았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을 매장시킨 미국의 윗선들은 뻔뻔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 현실 세상에서도 위에 계신 분들은 여전히 오펜하이머 청문회나 스트로스 청문회의 그 사람들처럼 뻔뻔하게 철판을 깔고 사람을 매도하고 없는 죄를 내세우며 다시 상황이 바뀌면 자신들이 묻어버린 사람을 성자로 내세우는 짓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러한 현재의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의 현재 윗분들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니 더욱 이 영화의 메시지에 강하게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