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인터넷을 통해 처음 선보인 단편 영화, '다찌마와리'는 지금도 실험 영화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류승완 감독의 첫 영화이자 많은 실험이 담긴 영화로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 디지털 촬영과 인터넷 무료 공개, 그리고 과거 20대 후반에서 40대들이 어릴 때 즐기던 영화와 TV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내용 구성까지.
지금 새롭게 선보인 '다찌마와리'는 과거의 것과는 이름과 주연배우를 빼면 적어도 비슷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 즐기던, 하지만 지금은 싸구려와 불량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너무나
싸구려스럽게' 담겨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 번 싸구려 영화를 제대로 즐겨 볼까요?
■ D급을 지향하는 C급 영화
이 영화의 홍보 영상은 많은 분들이 보셨겠지만, 이 영화는 007의 패러디물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총알탄 사나이'의 오마쥬라고 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007의 옷을 입은 총알탄 사나이라고 해야 할까요. 총알탄 사나이가 'C급을 지향한 B급 영화' 정도였다면, 다찌마와리는 'D급을 지향하는 C급 영화'에 가깝습니다. 미국의 감성과 대한민국의 감성의 차이입니다만, 적어도 주인장은 이 영화를 저 낮은 단계를 지향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찌마와리는 기승전결과 화면의 완전성을 따지는 관객이라면 분노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저급 영화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의 로케이션은 '관객을 우롱하는' 수준인데, 서울 사람이며 지형에 밝은 사람이면 누구나 '성수대교'로 인식할 수 있는 장면을 떡하니 갖다 놓고 김구 선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올려 놓습니다. 그걸 임진강, 압록강,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면 아무도 믿지 않죠. 어디 강원도 눈썰매장이나 스키장임이 명백한 곳을 스위스라고 벅벅 우기며 어디 우리나라 대학 건물쯤 되는 곳을 미국의 연구소라고 타이틀을 달아 놓았습니다. 만주라고 한 곳도 한강 어딘가 모래톱이겠죠.
적어도 상식이 있는 관객이라면 영화가 설명하는 로케이션으로 절대 속아줄 수 없는 이런 장면을 대놓고 올려 놓는 것은 보통 영화라면 관객 모독입니다. 하지만 다찌마와리를 보는 관객은 이것을 보며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범함에 껄껄 웃어주기까지 합니다. 로케이션을 갈 돈이 없어서, 적어도 티는 안 나게 할 기술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이런 어설픔은 영화의 'D급 감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토리 역시 제대로 된 뼈대도 없는 엉성함 그 자체입니다. 줄거리의 뼈대는 이미 알려졌듯이 독립군 정보요원 '다찌마와리'가 군자금 모금 비밀 요원의 명단을 숨긴 저질(14K. 도금에 가깝습니다.) 금불상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하지만 배경이 너무나 싸구려인 만큼 내용도 고급일 수 없는 법. 내용 진행은 결코 부드럽지 않으며, 전개는 휙휙 넘어갑니다. 결말을 향해 가는 지점의 반전 역시 충격을 받을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따질 것도 없을 정도로 싸구려 냄새가 펄펄 나며, 이 영화의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찾기 위해 눈이 빠져라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할 것입니다.
■ 우리는 싸구려의 감성을 원한다.
다찌마와리는 관객의 당연한 동의하에 관객을 우롱하는 엉성한 내용을 너무나 당당하게 폅니다. 도대체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기에 사람들은 이렇게 즐겁게 웃을 수 있을까요? 단순히 허무 개그라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어떤 주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으며 과거에 경험한 '싸구려에 대한 감성'을 되살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0대 후반에서 40대에 걸친, 즉, 70년대와 80년대 초중반에 영화를 보고 TV를 보며 뛰어 놀며 자란 사람이라면 그 시대의, 지금은 '싸구려'나 '짜가'로 불릴만한 여러 문화를 체험하며 즐겨 왔습니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 고급스러운 것을 지향하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에 반대되는 싸구려를 원하는 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항상 정의를 외치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는 '다크 히어로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는 사람들을 대변한 것이 만화 '시티헌터'이며, 그 결과는 만화의 대성공으로서 끝났습니다. '다찌마와리'는 고급/세련됨을 추구하지만 과거에 경험했던 저질, 싸구려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합니다.
그러한 싸구려에 대한 동경은 너무나 티가 나는 배경과 허술한 시나리오 말고도 60~70년대 스타일의 똥폼 가득한 '빠다 한스푼 떠 먹는 듯한' 느끼한 대사, 쓴웃음까지 나오는 오버 액션, 상식과 동떨어진 행동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눈빛 한 번에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자칭 미남이자 쾌남'인 다찌마와리의 마초적인 태도는 21세기의 남여평등 시대에는 거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어릴 때의 그 시절에는 이런 똥폼은 한 번쯤 잡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완전한 더빙의 후시녹음, 콩글리시 수준도 넘은 엉망 외국어를 덧붙이면 이 영화는 완벽한 싸구려가 됩니다.
우리는 '쫀듸기'나 '아폴로', '달고나'라는 단어를 들으면 부모님이 그렇게 먹으면 혼을 내던 불량식품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먹고도 멀쩡히 잘 살아 있어 이것이 그리 큰 해가 없음을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을 먹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했듯이 애들을 혼냅니다. 대신 우리 마음 속에 이런 단어는 여전히 '싸구려지만 먹고 싶은' 것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다찌마와리가 보여주는 여러 장면은 우리가 즐겼던 여러 싸구려(?) 문화의 속성을 섞어 놓았습니다.
언론에서 나라 전체가 조폭이 되지 않을까 오버 액션을 떨게 만든 홍콩의 무협액션과 홍콩느와르,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더빙 녹음이 되어 똥폼을 잡던 '방화'들, '웃으면복이와요'나 '유머1번지'에서 볼 수 있던 슬랩스틱 액션... 이 모든 것은 지금은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평가 받으며 유행도 지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신 3D 기술이 난무하는 영화를 보면서도 과거 그 때를 잊지 못하며, 대학로의 개그를 보면서도 유치한 슬랩스틱 코미디를 그리워합니다. 과거 다찌마와리는 이런 유치한 싸구려 감성을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고, 비록 그 내용을 달라졌을지라도 현재의 다찌마와리 역시 이 점을 그대로 이어 받습니다. 이런 키치(Kitsch)적인 감성을 다시 되살린, 21세기의 실험 영화가 다찌마와리입니다.
■ 전적으로 다찌마와리를 위한 영화
일부 언론에서는 '다찌마와리판 본드걸' 운운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는 전적으로 '다찌마와리' 역인 임원희만을 위한 것입니다. 한국의 본드걸로서 언론이 띄워주는 공효진도, 박시연도 임원희를 띄워주기 위한 도구일 뿐 사실상 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주연으로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않지만, 조연으로서는 여전히 빛이 나는 류승범 역시 이 영화에서는 '좀 자주 나오는 악역' 이상의 무게를 갖지 않습니다.
이런 한 명의 힘으로 굴러가는 영화는 주연의 능력에 따라서 완성도가 정해집니다. 적어도 임원희는 이러한 기대를 전혀 거스르지 않습니다. 류승완 감독이 원하는 영화의 감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 감성을 100% 구현하기 위해 한 몸을 던집니다.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 주제입니다만, 다찌마와리 역으로 임원희 대신 류승범을 뒀다면 이 영화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류승범 역시 영화의 감성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다찌마와리라는 그로테스크한 인물을 그려내기엔 한계가 있습니다.(류승범의 캐릭터는 어떻게 해도 Loser의 것이기 때문에 '먼치킨(Minchkin)'인 다찌마와리를 그려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미녀도 눈빛과 말 한 번에 뿅가게 할 수 있으며 지나칠 정도의 폼과 능력을 갖고 있는 먼치킨, 다찌마와리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인 임원희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영웅이나 주인공의 인상과 너무나 다르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 그리고 류승완 감독의 키치적인 감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 그것이 임원희이며 그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공효진도, 박시연도 그저 테이블을 장식하는 장미 한 송이에 불과하며 류승범은 스테이크 접시를 장식하는 파슬리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그들이 당당하게 크게 부각될 정도는 아닙니다.
■ 100분이 즐거운 초 싸구려 영화
100분의 시간은 공간적으로, 내용면에서도 완전히 싸구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리뷰에서 극찬하는 액션 연기 역시 볼만은 하나 그 자체가 영화를 고급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화려한 액션 속의 각 인물들의 허술함이 본질에 가깝습니다. 보통 영화였다면 100분동안 관객을 모독하는 내용을 참고 볼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마는, 싸구려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은 즐거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봐 왔으며 지금은 마음 속 한 곳에 부정적인 봉인이 붙은 채로 잠든 싸구려 감성을 철저히 이끌어낸, 우리가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류승완 감독은 그대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감성은 이제 너무나 오래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미 충분히 화려한 문화를 접하며 자라고 있는 10대들에게는 이 영화는 어설픈 코미디로 비쳐질지 모릅니다.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기엔 너무나 아쉽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특이함을 즐거워 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적어도 '키치'적인 감성이 없다면 이 영화를 절반만 즐기고 있다고 해도 좋습니다.
60년대 영화를 보는 듯한 닭살 돋는 딱딱한 명대사들을 음미해도 좋고, 외팔의 검객같은 액션을 즐겨도 좋습니다. 최대의 웃음을 주는 지저분한 연기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며, 엉터리 외국어와 두 번 나오는 불법 DivX 영화의 자막같은 장면에 미소지어도 성공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본질은 우리 마음속의 봉인한 싸구려 감성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급 인생인 척 하며 살아도 우리는 여전히 싸구려를 그리워 합니다. 와인의 브랜드와 생산지까지 따지며 풀 코스를 즐기면서도 가끔은 안성탕면 한 그릇이 그리운 것 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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