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 지하철 8호선이 수도권 전철 8호선으로 탈바꿈하는 날이었습니다. 예. 암사-별내를 잇는 별내선이 개통하여 기존 서울 지하철 8호선에 붙은 것인데, 이걸로 다산 신도시와 구리시도 제대로 된 지하철 오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구리는 경의중앙선이 가기는 하는데 배차 간격이 너무 길죠.
기존 서울 지하철 8호선은 암사부터 성남 모란까지 가는 노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성남'을 가는 지하철인데 왜 '수도권 전철'이 아닌 '서울 지하철'이라고 부를까요? 다른 것은 시 경계를 넘는 연장 시점(3호선 지축은 제외)에서 수도권 전철이라고 불렀는데 이건 처음부터 성남을 갔는데 서울 지하철이라 불렀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사실 이게 다 이유가 있는 이야기인데, 바로 성남시의 슬픈 과거와 관련이 있습니다. 8호선 연장 기념(?)으로 오늘은 이 8호선과 관련이 있는 이 성남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이 뉴스는 서울 지하철 8호선과 관련이 없는 천호대교 공사 이야기입니다. 사실 서울 지하철 8호선의 완공 전에 대한뉴스가 끝나버려 이 이야기는 없기도 하죠. 물론 뉴스들 가운데 2기 지하철 계획에 관련 이야기가 나오긴 합니다만. 다만 지금 뜬금없어 보이는 이 천호대교도 오늘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성남시. 아직 100만 인구는 안 되었지만 거의 100만을 바라보는 거대 위성 도시입니다. 구 성남 시가지와 남쪽의 분당, 북쪽의 판교 및 위례신도시를 합친 나름 복합적인 도시입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무슨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냐구요? 진짜 그 시작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생뚱맞았습니다.
원래 성남은 구 성남으로 부르는 수정구, 중원구 지역이 그 시작입니다. 하지만 지도를 잠시 펼쳐 수정구와 중원구의 오른쪽을 잘 봐 주십시오.
예. 남한산성 산 밑. 이런 불편한 입지에 자연적으로 큰 마을이 생길 리 없죠. 성남의 시작인 구 성남은 사실 계획도시였습니다. 아, 더 정확히 말하죠. 계획을 세워 만들기는 했는데 실상은 계획이고 자시고 없이 마구잡이로 만든 도시였습니다.
1970년대. 서울의 인구는 계속 늘어났고 썬글라스 박 정권과 서울시는 이렇게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개발 계획을 여러 개 세워서 실행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이 계획 자체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했는데, 1963년 서울 대확장을 통해 서울의 크기가 확 커졌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중랑/강북/노원/도봉구쪽의 상당수는 서울이 아니었고, 한강을 건너면 여의도, 영등포, 흑석동쪽을 빼면 경기도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63년에 강남쪽이 전부 서울로 편입되고, 의정부로 가는 지역 역시 서울로 편입됩니다. 이후 1973년에 구파발이 서울로 편입된 것을 빼면 작은 경계 조정만 있을 뿐 지금의 서울 형태가 완성됩니다. 이렇게 강남 개발이 이뤄지게 된 것이죠.
그렇지만 서울의 확장은 원래 이걸로 끝나는게 아니었습니다. 원래 서울시 도시 계획은 더 확장하는 것이었는데, 서울 대확장 당시부터 찜을 해둔 곳이 지금의 광명과 과천, 구파발 및 지축/삼송 지역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구리와 남양주 일부(갈매/별내)와 부천까지 확장할 생각을 했는데, 이 가운데서도 광명은 서울 편입 0순위로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광명이 02 전화번호를 쓰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1973년 구파발 편입을 끝으로 이들 지역의 서울 편입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지역은 나름 서울 편입을 생각해 개발을 진행한 곳이라 신도시라는 말은 안 썼지만 나름 서울과 정부 주도로 체계적으로 개발을 했습니다. 일단 광명과 과천은 정부 주도로 서울 편입을 전제로 했고 이후에도 나름 신도시급으로 체계적으로 개발한 곳이라는 것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하지만 성남은 다릅니다. 성남은 이렇게 서울시 편입을 전제로 개발한 곳이 아니라 반대로 서울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이 곳은 정부와 서울시가 정말 나쁘게 말하면 '인간 폐기물 처리장'으로 만든 곳입니다. 권위주의에 찌든 군사정권의 눈에서 인간 쓰레기로 보였던 도시 빈민들이 그 처리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이 모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도시를 운영하는 잘나신 분들 눈에는 눈엣가시인 것은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서울 한복판, 청계천과 서울역 주변에 판잣집을 지어 살고 있었는데, 도심 개발을 하고 싶어하는 높으신 분들에게는 이게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권위주의 정권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도 잘 살고 있는 빈민들에게 총칼을 들이대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 무엇보다 그냥 닥치고 쫓아내면 다시 서울 어딘가에 판잣집촌이 생기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기에 나름 이들에 대한 대책이라고 세운 것이 '경기도에 살 땅 만들어 줄테니 다시는 서울 들어오지 말고 조용히 살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조건만은 정말 파격적이었습니다. 1가구에 20평씩 땅을 주고 그 가격도 당시로서도 획기적인 가격(평당 2,000원)에 공급하며 주변에 공장도 지어줘서 서울에 안 와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땅값도 2년 거치 분할 상환. 이러니 안 넘어올 사람들이 있는지요? 10만명의 서민들이 이 땅으로 가겠다고 몰려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 위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거 완전 산비탈입니다. 사람이 편히 살 땅은 못 되죠. 실제로 구 성남 상대원공단쪽 가보시면 언덕의 각도의 차원이 다릅니다. 부산 산복도로 생각나는 그런 레벨이죠. 왜 하필 사람이 살기도 어려운 저런 곳에 10만명을 몰아 넣을 생각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농지 보호'였습니다. 조금이라도 깎아지르지 않은 땅은 농사를 지어야 하니 빈민들 집으로 주기 아깝다 이거였죠. 즉 사람보다 농지가 더 중요하다는 논리가 여기에 개입했습니다.
뭐 어쨌거나 정말 획기적인 가격에 집을 주겠다는데 내집 장만의 꿈을 지닌 판잣집 사람들은 여러 꿈을 안고 당시에는 '광주대단지'로 불린 이 땅으로 가재도구를 리어카에 싣고 머리에 이고 왔습니다. 성남이 아닌 광주대단지인 이유는 이 당시 주소지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아래 사진의 뒷편을 보세요.
사람 살라고 만든 땅이 저렇습니다. 더 쉽게 설명을 하면 광주대단지라는 것의 정체는 가구 당 20평의 주택용지를 분양하는 것이지 집을 지어 분양한다는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용지 구획만 정리해 놓고 거기에 텐트 하나 놓고 거기서 살라 이거죠. 상하수도요? 그런 거 공사조차 안 했습니다. 도로 정비요? 누구 아이 이름인가요? 주택용지에 줄 긋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 이게 어딜 봐서 도시계획인지요? 이게 광주대단지의 실체였습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주변에 공장을 지어 서울에 안 들어와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준다 했습니다. 하지만 공장이요? 지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지금 눈물 젖은 빵, 피로 만든 빵이라 불리는 SPC 계열의 빵공장들이 위치하는 상대원공단은 그 뒤에 생긴 것입니다. 속았다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더군다나 어떻게든 서울로 가서 벌어 먹으려 해도 당시 광주대단지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는 서울 시영 버스 270 하나 뿐, 그것도 일부만 운행했습니다. 아, 이 버스는 이름을 바꾸고 노선을 조정하긴 했지만 지금도 살아는 있습니다. 서울 버스 303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먹을걸 사려 해도 가까운 시장이라는게 모란장 하나 뿐입니다. 지금이야 전국 최대 장으로 불리지만 당시는 그냥 깡시골 5일장이었죠.
아무리 땅을 싸게 준다 한들 먹고 살 것이 없는 이 땅에서 빈민들이 살 수 있을 거 같은지요? 배고프고 돈도 없는 빈민들은 푹푹 찌는 텐트 안에서, 상하수도조차 없어 파리가 날리는 더러운 환경에서 버텨야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분양권을 받은 빈민들의 상당수는 그나마 이 땅에 집 지을 돈은 있는 상대적으로 좀 나은 서민들에게 이 분양권을 팔았습니다. 이 일반인의 비중은 점점 늘어 나중에는 전체 입주자의 절반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뭐 당시 세상이 워낙 깽판이었으니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 제대로 계획을 세워 만든 광명과 과천과 달리 빈민들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람을 처리하는 장소로 생각했던 위정자들은 광주대단지 계획을 '땅만 대충 골라두면 거기 주민들이 알아서 상하수도와 전기 시설 만들고 상점도 만들고 공장도 만들지 않겠음?'하는 행복회로를 돌려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광주대단지가 이렇게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하자 정부가 이상한 꿍꿍이를 갖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를 부릅니다.
처음에는 빈민들의 짬처리(?) 목적으로 세운 광주대단지 계획은 일반 입주민 비중이 늘자 '땅장사' 모드로 돌변했습니다. 빈민들이 내놓은 분양권을 투기 세력들이 사들인 뒤 일반 서민들에게 폭리를 붙여 팔았는데, 정부와 서울시는 이를 단속하기는 커녕 오히려 일반인들이 광주대단지의 진상을 알지 못하도록 입을 다물고 오히려 투기를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돈으로 강남도 개발하고, 강남 개발이 끝나면 다른 지역도 개발하겠다는 공돈으로 개발한다는 꿈을 갖고 말입니다.
그리고 1971년 6월. 공식적으로 해당 용지에 대한 청구서가 각 가정에 날아 들었는데, 평당 2,000원이라고 하던 땅값은 최소 8,000원에서 최대 16,000원으로 뻥튀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강남의 분양가 레벨이었습니다. 입주를 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투기 세력에게 분양권을 다시 사들인 사람들이니 빈민들에게 약속한 분양가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는데, 그것도 2년 거치 상환에서 당장 한 달 안에 완납하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그것도 나중에는 최소 땅값을 평당 12,000원으로 올려 버렸습니다.
정부 약속의 최소 4배, 거기다 돈도 한 방에 다 내라는 기막힌 조건에 서울 들어가는 것도 미션 임파서블, 장 보는 것도 미션 임파서블, 일자리 구하는 것도 미션 임파서블인 이 동네에 살라면 살겠는지요? 당연히 머리에 피가 솟구치죠. 이 사태에 사람들은 한데 뭉쳐 용지 분양가의 재조정, 정부가 약속한 공장 등 일자리 확보 시행, 분양가의 거치 상환 등 당연한 요구 사항을 마련해 정부와 서울시에 협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와 그 뒤에 있는 정부는 아예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이러한 정부의 만행에 주민들은 샤이어인에서 초샤이어인으로, 초샤이어인3로 진화하고 있었습니다.
8월 초, 아예 세금까지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들자 주민들의 참을성은 폭발하여 8월 10일까지 요구에 정부가 답을 하지 않으면 행동을 시작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정부는 이 시점이 되어서야 자기들이 10만의 주민들을 폭탄으로 만들고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정작 그 전에 협상을 끝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8월 10일이 되었고, 이 날 주민 대표들과 양택식 서울시장은 11시에 면담을 갖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11시에 서울시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건 사고였습니다. 서울시청에서 양택식 시장이 출발한 것은 오전 7시였지만, 서울도 도로 정비가 되지 않은 곳이 많은데다 당시 광주대단지로 갈 수 있는 길은 머나먼 광진교 하나 뿐. 서울에서도 길이 막혀서 시간을 다 잡아 먹어서 3시간이 지나도록 광주대단지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11시 30분이 넘어서야 협상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지옥도가 된 광주대단지를 보게 됩니다.
협상 예정 시간 전인 10시. 협상장 주변에는 항의 시위를 하는 5만명 가까운 인파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달된 것은 '서울 시장이 안 나타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눈 앞이 새빨간 색으로 보이게 된 그들. 씨바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으셈 T_T 모드가 열렸습니다. 국사책에서만 보던 민란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12시가 되기 전에 당시 광주대단지를 관할하던 성남출장소가 불에 탔고 차도 털려 차에 탄 사람들은 광주대단지 곳곳에서 폭동을 벌였습니다. 수만의 인파를 얼마 안 되는 경찰이 어찌할 수 있는지요? 오후에는 경찰서까지 습격당했고 경찰기동대까지 출동했지만 오히려 시위대에게 밀렸습니다. 재수 없게 지나가던 참외 트럭이 습격당한 참외 습격 사건은 웃기고도 슬픈 이 사건의 해프닝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렇게 광주대단지를 초토화시킨 군중들은 얼마 안 되는 자동차들을 습격해 털어 서울 진격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 상황이 되었으니 정부에서는 어찌하겠습니까? 자기 잘못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학살극을 펼치겠는지요? 아무리 정부가 국민을 뭣같이 알던 시절이지만 최소한 이 때는 국민을 대상으로 학살극을 펼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출발 전부터 주민 요구를 대다수 수용하기로 했던 상황이었으며, 폭동으로 번지자 사태 수습을 위해 더욱 깨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땅값의 재조정과 분납을 비롯한 핵심 안건과 함께 교통망 및 상하수도 등 인프라 건설, 교통망 확충, 공장 신설 등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약속을 다 하고 나서야 이 소동은 가라 앉았습니다.
사태가 진정된 뒤 정부는 주동자를 잡아서 처벌한다고 했으며 군사정권 내내 이 사건을 폭동으로 매도하며 평가절하를 했지만, 스스로 꺼낸 약속을 뒤집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경우 훨씬 큰 수준의 폭동이 벌어질 것은 뻔했으니까요. 피와 눈물로 만든 빵이라는 소리를 듣는 21세기에도 악명높은 노동현장인 상대원공단은 지금도 산 중턱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땅은 광주대단지가 아닌 성남시라는 별도의 지역으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왜 8호선과 천호대교가 이 사건에 관련이 있는지 적어봅니다. 광주대단지 사건의 수습책으로 정부가 한 약속 가운데는 서울로의 접근성 향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서울로 못 들어오게 하려고 만든 곳을 서울로 오기 쉽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가장 먼서 시행한 것이 서울 시영 버스 270의 증차였는데, 원래 지선 형식으로 몇 대만 배차한 것을 모든 버스가 광주대단지로 들어오도록 연장했습니다. 당장 급한 불은 이걸로 끌 수 있었지만, 왕복 2차로에 불과한 광진교를 거쳐 돌아가는 도로로는 한계가 있어 다리를 더 놓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 천호대교이며 이후 잠실대교도 비슷한 이유로 만듭니다. 어차피 잠실과 송파 지역을 개발하려면 다리가 필요하기도 했구요.
서울 지하철 8호선 역시 사실 이러한 광주대단지에 대한 정부의 배려의 연장선입니다. 물론 이것이 실제 놓인 것은 1990년대 후반 이야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IMF같은 예산 문제와 자주 바뀌는 지하철 계획으로 인한 사업의 지연이 원인이었을 뿐입니다. 서울시 예산(정확히는 정부에서 서울시에 별도 예산 지원)으로 만드는 서울 지하철임에도 절반은 성남을 거치며, 그것도 구 성남 시가지를 돌아 가는 구조로 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 성남 인구는 50만까지 늘어서 지하철이 없으면 못 사는 상황이긴 했습니다만, 수도권 전철 8호선이 아닌 서울 지하철 8호선이 성남 마을 전철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이러한 뒷배경 말고도 우리나라 역사에 꽤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빈민과 서민을 중심으로 모인, 그리고 악명높은 상대원공단이 있는 성남시는 좋게 말하면 진보적인, 나쁘게 말하면 배타적인 나만의 사상이 자리잡기 좋았는데, 그 결과물이 NL 가운데서도 극단주의 경향을 띠는 경기동부연합입니다. 이게 아니더라도 서울에 데인 것이 많은 구 성남시 주민들은 서울과 아예 다른 동네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다른 지역은 제발 서울에 합쳐달라고 할 때도 성남은 관심조차 안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총선을 살짝 덥힌 메가 서울 논쟁에서도 성남은 아예 불구경하는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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