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힘은 나름 위대합니다. 아, 마크로스 이야기냐구요? 대한뉴스 이야기에 '데카르챠'라고는 안 합니다.^^ 이런 서브컬처 이야기가 아닌 나름 진지한 이야기입니다. 잘 지은 노래 하나는 동네 하나의 이미지를 바꾸고 동네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전라도의 18번이 목포의 눈물과 남행열차요, PK하면 부산 갈매기가 BGM으로 머릿 속에 울리고, 인천하면 자동으로 연안부두가 튀어 나오는게 다 노래의 힘 아니겠는지요?
진성의 트로트 곡, '안동역에서'는 쇠퇴하던 경북 도시인 안동시를 전국적으로 다시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며, 히트한지 얼마 안 되어 구 안동역 앞에 노래비가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이건 요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그 전에도 이런 성공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냥 듣보잡 시골 장터를 전국적인 메이저 장터급 이미지로 격상시킨 노래, 조영남의 '화개장터'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대한뉴스는 이 화개장터에 대한 내용입니다.
화개장터는 다들 이름은 들어 보셨을 것이지만 안 가본 분은 도대체 어디 가 있는지 모르실 것이라서 한 번 일단 지도부터 올리고 봅니다.
지도를 좀 작게 하긴 했습니다만,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화개면 중심지이기는 하나 화개면 읍내가 워낙 작아서 뭐 크게 볼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주변 수 km 안에 뭐 대단한 것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뒷쪽은 그 유명하신 지리산, 섬진강 건너에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험하고 높은 백운산이 버티고 있고, 저 섬진강 강기슭으로 약간씩 마을이 형성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충 구례까지 지금도 차로 16km, 하동 중심까지는 대충 21km 정도라서 정말 거리도 애매모호합니다.
일단 사람이 사는 곳이니 크기가 어떻건 5일장이 서기는 하겠는데, 그나마 이 장이 나름 지역에서는 먹고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저 섬진강 덕분입니다. 화개는 섬진강 하류에서 나룻배로 올라올 수 있는 한계 지역인데, 하동이나 광양 등 남쪽 지역에서 수산물이나 농산물을 싣고 올라와 나름 동네 크기 대비 큰 장이 설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장은 경상도인 하동에 있지만 당시 노점상과 이용객 대다수는 엉뚱하게 전라도인 구례 사람이었습니다. 하동 입장에서는 섬진강이 통하는데 굳이 더 북쪽으로 올라올 필요도 없다는 이유도 있지만, 반대로 화개가 배로 올라올 수 있는 한계이기에 배가 못 올라오는 구례쪽에서는 여기에 장이 서면 어쩔 수 없이 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상도 땅에 전라도 중심의 장이 서는 좀 기형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물론 화개장터가 그 주변에서는 나름 네임드였을지 몰라도 전국적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듣보잡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성남 모란장이나 여주장처럼 1980년대에도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전국구 네임드와 비교하면 화개장은 초라하죠. 그래도 이 특이한 구조 덕분에 나름 신문 사회면 한 칸은 차지할 수 있었는데, 그 신문에 소개된 화개장터가 이 장의 운명을 바꿉니다. 1987년 10월 경향신문 기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사를 소설가 김한길이 읽으면서 화개장터의 성공담이 시작됩니다. 지금은 소설가보다 정치인, 그것도 민주계에서 보수로 전향한 뒤 지금은 보수의 단물만 빨아 먹는 퇴물 소리를 듣는 사람이지만 이 분이 없으면 화개장터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이 당시부터 정치적인 성향이 강했던 김한길은 영호남 화합에 대해 무언가 썰을 풀고 싶어했지만 솔직히 영호남의 감정의 골은 은근히 깊으니 그냥 설교조로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죠. 그 때 이 기사가 눈에 띄었는데, 이걸 당시 동거(?)하던 가수 조영남에게 보여주고 이 내용으로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당시 조영남은 사생활 문제로 인기가 가라앉은 시기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시골 장터를 주제로 노래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영 마음이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를 했지만 나름 성공 가능성을 예감한 김한길의 강한 설득으로 김한길 작사, 조영남 작곡으로 태어난 곡이 이 화개장터입니다. 사실 지금은 이 노래를 모를 사람이 많지 않지만, 당시 인기의 바로미터인 가요톱텐 1위는 한 번도 못 찍었습니다. 그래도 중위권에서 오래 버티면서 오랫동안 라디오와 길보드를 통해 퍼졌는데, 이런 롱런이 지금까지 이 노래가 인기곡으로 살아 남은 비결이 되었습니다.
노래가 발표된지 얼마 되지 않아 찍은 저 대한뉴스 영상처럼 당시 화개장은 그냥 말 그대로 시골장이었습니다. 영남 땅에서 호남 상인과 호남 손님 다수에 상대적으로 소수라지만 영남 상인과 손님도 오는 이 재미있는 공간은 정치권에서도 나름 관심을 둘만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름 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화개장은 이름만큼은 여주장이나 모란장 못지 않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사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화개장터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 2001년 이전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화개장이 나름 인기를 모으고 소득증대와 교통수단 발달로 나름 외지에서도 손님이 찾아들자 하동군은 이 화개장을 그냥 깡 5일장에서 관광 상설장으로 바꿔 버렸기 때문입니다. 예. 지금의 화개장터는 구례나 하동쪽의 실수요자를 대상으로 한 곳이 아닌 외지 관광객을 위한 곳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그 느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영호남 화합이라는 그 명제조차 이 과정에서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관광 시장으로 변모한 화개장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점포를 영남(하동군) 사람들에게 배분했습니다. 이에 욕을 먹자 생색을 내는 듯이 일부를 호남 출신 상인에게 개방했는데... 그 비중이 5%가 안 됩니다.
조영남의 화개장터의 히트는 이 장을 메이저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지만, 그 결과 전상도 경라도의 화개장터에서 경상도 경상도의 화개장터로 변모시켰습니다. 사실 이게 다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기에 씁쓸할 따름입니다. 김한길과 조영남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 그 넘의 돈이 웬수일 뿐이죠.
추신: 아, 지금의 화개장터는 그 2001년 버전의 연장선도 아닙니다. 2020년 8월에 홍수로 화개장터가 싹 날아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화개장은 그 때 날아간걸 재건한 것입니다. 사실 제가 그 며칠 전에 휴가로 화개를 포함한 나름 중부 종단 자동차 여행을 갔는데, 그 때도 기존에 내린 폭우로 강물이 많이 불어 있었는데, 며칠 뒤 화개가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씁쓸해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때 가본 화개장터는 그냥 관광지였을 뿐이라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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