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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14) - 이런 씨x 드러운 네트워크, ISDN

dolf 2023. 11. 7. 12:27

현재 대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라는 말을 쓰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좁은 국토(?) 덕분에 산 깊은 곳에서도 최소한 LTE가 터지고,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도 VDSL급의 인터넷은 들어오고, 수 십 가구 정도의 마을이면 기가 인터넷도 기본인 세상이죠. 인터넷 문화까지 강국이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적어도 인프라 면에서 강국이라는 점은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 강국이었을까요? 당연히 그럴 리 없죠. 과거에는 PC 자체가 있는 집에만 있던 물건이고, 인터넷은 커녕 PC 통신도 나름 환경이 갖춰진 사람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다 케이블모뎀(HFC)와 ADSL이 나오면서 인터넷의 속도는 급속히 빨라졌고, 지금의 100Mbps급이나 반기가, 기가급 인터넷들은 이들의 확장 규격이자 후속 규격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36Kbps~56Kbps에서 순식간에 8~10Mbps로 빨라진 이 인터넷 급변기에서 중간에 무언가는 없었을까요? 예. 있었죠. 지금은 다들 기억 속에서도 있을까 말까한 서비스, ISDN이 그 물건입니다.

 


 

 

일단 ISDN 이야기를 하기 전에 PC 통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것이 대한민국, 아니 이걸 만든 미국에서도 좀 보급이 된 것이 1990년대 중후반 이야기니 그 전의 전자 통신이라는 것은 전부 폐쇄적인 방식, 즉 PC 통신이었습니다. 1984년에 PC통신의 시작이 이뤄졌고, 그 이전에는 일종의 개인 및 대학교 차원에서 소규모 BBS(게시판)을 운영한 정도였습니다. 이 1980년대 중반에 PC통신의 3대장의 시작인 하이텔(당시는 케텔)과 천리안이 나왔고, 1990년대 초반에는 마지막 3대장인 나우누리가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는 모뎀이 이런 식입니다. 시리얼 타입 외장형도 있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대세는 아니죠.(이미지 출처: Wikimedia)

 

이 PC 통신을 쓰려면 전화 신호를 데이터 전송용으로 바꾸는 장치, 즉 모뎀(MoDem)이 있어야 합니다. 당시로서는 PC도 매우 비쌌는데, 모뎀까지 갖추려면 더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속도는 1,200bps~2,400bps 수준으로 글자를 가져오는 것도 몇 초씩 걸리던 시절입니다. 모뎀의 속도는 계속 빨라져 1990년대 중반쯤 되면 33.6Kbps~56Kbps까지 올라갑니다. 그래도 글자를 불러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고, 다운로드는 정말 답 없이 느리던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ZMODEM이나 KERMIT가 뭔지 아시는 분이면 당시 고생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여간... 이 모뎀과 '전화선'을 연결하여 서버에 전화를 걸어(ATDT01410...) 접속하는 것이 PC 통신인데, 이 통신을 하는 도중에는 전화가 계속 걸려 있는 상태가 됩니다. 즉 집전화로 PC 통신을 하면 그 집의 전화는 통화중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고 뭐고 없던 시절이고, 카폰이라는 것이 있기는 했는데 1980년대 중반의 카폰 가격은... 지금 차 값의 절반쯤 하는 물건입니다. 급한 일은 다 집전화로 걸고 받았는데 PC 통신에 푹 빠진 자녀가 있다면... 그냥 그 집의 집전화는 늘 불통인 것이죠. 이 때문에 오해도 많았던 시절입니다.

 

거기다 돈도 돈이었습니다. 그나마 PC 통신의 초창기의 전화요금은 도수제, 즉 전화 한 통화당 가격이라서 전화를 한 번 걸면 그걸 몇 시간이고 연결해 놓아도 추가 비용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더 벌고자 했던 한국통신(현재의 KT)에서는 전자식 교환기 도입을 비롯하여 통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여 통화 시간별로 요금을 내는 종량제를 도입합니다. 이후 PC 통신을 하는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는 통신비 과다로 태풍 셀마가 몰아치는 때 먼지가 나도록 애를 두들겨 잡는 일이 잦았습니다. 휴대전화 소액결제를 몰래 쓰는 지금 아이들의 과거 버전(부모 세대 버전)이라 할 수 있겠죠. 이 전화비 문제는 나중에 야간 한정 정액제 같은 것이 나와서 좀 상황이 나아지긴 합니다만, 이건 일단 중요치 않으니 넘어가고...

 

PC 통신을 하면 전화가 안 된다는 문제는 한국통신도 알고 이들 기술을 만든 미국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기존 모뎀을 이용한 PC 통신 방식을 개선한 방식을 개발했는데, 그게 종합정보통신망(Integrated Service Digital Network), ISDN입니다. 기존 PC 통신의 문제점인 음성 대역과 데이터 대역이 같아 둘을 동시에 쓸 수 없는 것을 개선해 전화 음성이 가는 대역과 데이터 대역을 분리시켜 전화는 전화대로 하면서 PC 통신도 함께 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속도 역시 국내에서 서비스 당시 56Kbps, 두 회선을 엮으면 최고 128Kbps까지 가능했습니다. 모뎀도 56Kbps까지 나오지 않느냐 하는데, 저 대한뉴스가 나올 1990년대 초반의 모뎀 속도는 14.4Kbps 정도라서 56Kbps면 충분히 빠른 속도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제대로 나오면 말이죠.

 

그런데... 이 꿈의 서비스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냥' 망했습니다. ISDN이 'Irun Ssibal Duruun Network'의 약자라고 깠던 것이 괜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거창한데 현실은 전혀 아니었거든요.

 

한국통신이 ISDN을 2년 정도의 시범 운영을 거쳐 공식 서비스를 시작한게 1993년입니다. 공식 서비스라고 전국에서 다 한게 아니라 나름 중견 도시 이상에서만 한 것입니다만, 시범 서비스를 2년 가까이 한게 무색하게 공식 서비스도 불안정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가입비도 비싸고 전용 모뎀도 사야 하는데 그 역시 꽤나 비쌌습니다. 그렇다고 요금이 저렴하냐... 오히려 전화 모뎀으로 쓰는게 더 쌌습니다. 정액제 그딴 거 없고 똑같은 종량제인데, 당시 요금을 요즘 기준으로 설명하면 한 시간 남짓 ISDN으로 PC 통신을 하면 스시집에서 1인 오마카세를 시킬 수 있을 정도였죠. 그럴 재력이 있는 집에서는 나름 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정한 서비스 때문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죠.

 

거기다 그 속도에 대한 장점도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었습니다. 1995년쯤 되면 그 당시에 팔리던 PC에 들어가던 모뎀이 보통 33.6Kbps였고 이후 56Kbps짜리도 나왔습니다. ISDN 1회선 속도를 그냥 모뎀으로도 낼 수 있게 된 것이니 그냥 PC 통신을 할 때 전화가 안 되는 것을 빼면 ISDN이 딱히 메리트가 없게 되었습니다. 2회선은 요금도 두 배니 이걸 고를 수 있는 용자 가정은 당시에도 많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1990년대 후반기가 되어 PC통신의 전성기가 열리면서 야간 정액제를 비롯한 PC 통신 전용 요금제가 나오면서 ISDN의 경제적인 가치는 더 떨어집니다. ISDN의 정액 요금제는 더 늦게 나왔습니다.

 

PC통신에 비해 2년 정도 늦게 ISDN도 정액 요금제가 나왔는데... 이 때의 상대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습니다. 1998년에 케이블모뎀 서비스인 두루넷의 상용 서비스가 이뤄졌고, 1999년에는 하나로통신의 ADSL이 시작되었습니다. 케이블모뎀이나 ADSL은 통신 요금도 정액제라서 PC 통신 전화 정액제 요금보다 좀 더 내면 그냥 무제한으로, 전화와 무관하게 쓸 수 있었고 그 속도 역시 염가형 라이트 버전도 1Mbps는 나와서 ISDN보다 훨씬 빨랐습니다. 8~10Mbps급인 풀 서비스면... 그냥 비교가 안 되죠. ISDN의 리브랜딩(ISDN2)를 해봤지만 기술면에서 달라질 것이 없으니 그냥 듣보잡. 결국 KT도 ADSL을 2000년에 시작하면서 ISDN의 세상은 사실상 종말을 고합니다. 저도 KT가 ADSL 상용 서비스를 최초로 시작할 때부터 썼습니다만, 확실히 그 때의 속도의 차이는 파격적이었습니다.

 

모뎀을 쓰던 PC 통신과 ADSL/케이블모뎀의 사이에는 지금은 듣보잡이 된 ISDN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도 빨랐지만 정책적인 대응이 너무 늦었기에 짧지만 강렬한 인상조차 주지 못하고 정말 듣보잡이 되어 대한민국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나마 ISDN 자체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기업이나 영업용(VAN 통신 등)으로는 그런대로 보급이 되어 나름 가늘고 길게 갔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것도 없었죠. 대한뉴스에서 나오는 최신 기술이라는 것의 상당수는 이처럼 우리 생활에 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간 것들입니다. 뭐 윗분들이 보는 눈이 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