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입이 시급합니다'라는 드립이 있습니다. 해외의 좋은 문물이나 제도를 국내에서도 받아들이자는 내용이지만, 실상은 국내 현실은 무시하고 그냥 폼나 보이는 것을 무작정 받아들이자 말하는 드립이라서 지금은 비웃음이라는 웃음벨을 울리는 요소로 자리잡은 상태입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도 선진국에 포함되지만, 과거 개도국 입장에서는 다른 선진국의 제도를 그냥 좋다고 받아들인 것도 꽤 있었습니다. 아, 정작 '진정한 민주주의'는 정말 안 받아들이려 하긴 했습니다만.^^
하여간... 선진국을 따라잡겠다고 여러 제도를 도입했지만 정작 대한민국의 현실에 맞지 않아 도태된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일광시간절약제(DST), 일명 '서머타임'입니다. 사실 Z 세대는 '저게 뭐여~'라고 할 제도이며, M 세대 초반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그런 제도입니다. 나름 선진화를 하겠다고 야심차게 시행했다 망해버린 이 제도, 한 번 들여다 볼까요?
사실 서머타임, 미국식으로 말하면 일광시간절약제는 전 세계적으로 따지면 낯선 제도는 아닙니다. 실제로 유럽 대다수 국가와 미국, 호주 등에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행을 자주 다니거나 이쪽에 거주하는 가족이 있다면 지금도 그렇게 낯선 제도는 아니겠죠.
이 제도 자체는 골프를 더 치기 위해서, 전쟁 때 일을 더 시켜먹기 위해서 시행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단 공통적으로 '해가 일찍 떴는데 그 시간에 퍼 자고 있는 것이 아깝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는 것이 조명이 지금처럼 크게 발전하기 이전에는 해가 지평선에서 올라오면 일을 시작하고, 서쪽에서 지면 일을 끝내고 잘 준비를 하는게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조명용 기름은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으니까요. 유채 기름을 저렴하게 짤 수 있어 밤 문화가 발전한 에도 시대 이후 일본같은 사례가 괜히 이상한 예외 사례로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여간 낮이 기니 동이 틀 때에 맞춰 시간을 당겨서 낮을 일찍 시작하고, 해가 질 때를 밤의 시작에 맞춰서 하여 이 때 되면 늦게까지 뻘짓하지 말고 얌전히 자자...는 제도가 서머타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서머타임 시작 시간이 되면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리는, 쉽게 말하면 한 시간을 당겨 생활하는 패턴을 갖게 됩니다. 서머타임을 적용 전에는 오전 5시 30분에 해가 뜬다면 이걸 적용하면 6시 30분이 되기에 사람이 일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때에 해가 떠오르게 됩니다. 반대로 오후 8시에 지는 해는 9시에 지는 것이 되어 해가 지는 시간대가 '밤'이 되게 됩니다.
이 제도는 대한민국에서 무려 세 번에 걸쳐 시도된 바 있습니다. 앞의 두 번은 미국물을 오래 드셨다고 미국 제도에 환장하신(?) 런승만 각하 치세인 1공화국때 일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51년까지 한 번, 이후에 잠시 중단했다 1955년부터 다시 시작하여 런승만 각하가 '니가 가라 하와이'가 되신 1960년까지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2공화국 이후에는 그 누구도 이걸 할 생각을 안 했다가 1987년에 '내년에 올림픽을 하는데 선진국의 잘 나가는 제도를 도입해야 하지 않겠음?'이라고 하여 다시 서머타임이 부활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서머타임은 이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 지금 기억 나시는 분 많으신지요? 예. Z 세대는 아예 겪지도 못한 이야기니 오래 전에 폐지된 이야기죠. 실제로 1987년과 88년 딱 두 해만 하고 말았습니다. 국내도입이 시급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올림픽 끝나니 싹 폐지한건 뭐냐구요? 이게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실 서머타임은 이걸 운영하는 나라들에서도 그냥 군말없이 좋은 아름다운 문화라고 잘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한참 해왔던 것이니 습관대로 하는 것이지 이걸 따르는 국민들은 툴툴거리고 있습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국민들을 더 굴려먹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으니 좋은 목적이라고 하기도 좀 힘들죠.
일단 서머타임은 전 세계 어디서나 할만한 제도가 아닙니다. 이 제도는 어디까지나 여름과 겨울의 낮과 밤의 시간 차이가 큰 국가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즉 지금이 여름이네 겨울이네 할만한 저위도 국가에서는 이걸 해봐야 오히려 아침에 해도 안 뜨고 별 구경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별 메리트가 없고, 반대로 안 그래도 해가 더럽게 안 지는 고위도 국가에서도 삶에 도움이 안 됩니다. 자정에 해가 지는 꼴을 보면서 날짜의 달력을 하나 넘기고 자는 것도 우습죠. 그래서 이 제도는 선진국의 대다수가 몰려 있는 중위도 지역에서나 그나마 가치가 있는 제도입니다. 대한민국도 일단 중위도이긴 한데 유럽을 기준으로 하면 남쪽의 위도죠.
더군다나 억지로 전 국민의 생활 리듬을 1년에 두 번씩 비틀어 버리는 제도이기에 이 시기에는 졸음 등으로 인한 여러 사회 문제가 나타납니다. 즉 교통사고의 증가나 아침 업무 효율성 저하 등이 있죠. 국민의 자유를 일단 서류상으로는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에서는 이 때문에 연방정부 차원에서 서머타임을 강제하기 못하고 주 단위의 자율에 맡기고 있어 누구는 서머타임을 하고 누구는 안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서머타임이 처음 나왔던 20세기 초반만 해도 등유로 불 켜고 살던 시절이라 밤에 불을 밝히는 낭비는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먹혔지만 1980년대 대한민국쯤 되면 집에 형광등이나 백열등 하나 못 켜고 사는 집은 그리 없었죠. 대한민국도 이런데 선진국은 어떻겠습니까? 서머타임의 중요한 논리였던 에너지 절약 효과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무력화되고 맙니다.
여기에 더해 대한민국은 해가 긴 시절에도 오전 5시 초반에 해가 뜨고 저녁 8시 전후로 해가 지는 만큼 서머타임을 적용하지 않아도 낮을 이미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6시부터는 이미 활동을 시작하니까요. 오히려 서머타임을 했더니 '시간은 이미 늦었는데 해가 안 졌다고 퇴근을 못하게 하고 일을 더 시키더라'는 사회적인 부작용이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제도가 시작된 1987/88년은 노동운동도 거세고 민주화의 물결도 사회 전체에 몰아친 만큼 억지로 일을 더 시키는 것에 대한 반감이 과거보다는 더 컸고 이는 정부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괜히 단 2년만 하고 말았던 것이 아닙니다.
굳이 서머타임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일출과 일몰시간, 서머타임 운영으로 인한 사회적인 불편은 크고 오히려 노동문제라는 골치거리를 낳아버렸으니 선진국에서 놀러오는 올림픽이 끝나자 바로 이 제도는 땅 속으로 묻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진짜 선진국이 된 지금도 이 제도를 다시 시작하자는 목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국내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싶어도 이 제도에 데여본 사람이 아직 사회의 주축인데 씨알이 먹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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