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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9) - 새만금, 그 안습의 역사

dolf 2023. 9. 21. 13:00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전체를 봐도 평야나 낮은 구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개마고원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게 끝 나는 북한은 그렇다 쳐도 대한민국만 따져도 동쪽은 그냥 높은 산, 남쪽도 높은 산에 200~500m급 산은 그냥 동네 마실용 뒷산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써먹을 수 있는 평지는 늘 바래왔던 것입니다. 기술 발전으로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드는 방법이 생기면서 당시로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겨지던(당연히 요즘은 갯벌의 가치 때문에 함부로 이 소리를 못 합니다만) 갯벌과 주변 바다를 메워 농사를 짓고 공장을 짓겠다는 생각은 어느 정권이건 주요 인프라 사업으로 추진해온 일입니다.

 

그 가운데 현재 진행형으로 수 십년째, 아니 세대를 거쳐가며 진행하고 있으며 지금 이 상태로 볼 때 다시 다음 세대에서도 끝날까 말까한 간척 사업이 있습니다. 올 여름, 전 세계 청소년들을 푹푹 찌는 더위와 습기 속에서 불지옥을 보게 만들었던, 예. 그 '새만금'입니다. 사실 이 새만금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가고 있는, 나름 불쌍한 개발 계획이기도 합니다. 이 불쌍한 역사를 한 번 볼까요?


이게 대한뉴스 2004호 이야기입니다. 2040호가 마지막이니 거의 최후기 내용인데, 이 때가 새만금 개발을 시작한 지 3년 째 되던 시절입니다. 나름 희망에 가득찼을 시절입니다. 지금 이렇게 될거라고는 당시에는 생각조차 못 했겠죠.

 

대한민국에는 의외로 간척 사업을 통해 생긴 땅이 꽤 많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서해안과 전라도쪽 남해안은 조금씩이라도 손을 댔다... 이런 차원입니다. 수도권에서 대표적인 간척지라면 시화호 간척 사업으로 생긴 안산 서남부나 화성 송산쪽을 들 수 있겠죠. 인천 송도나 청라, 인천공항도 간척지구요. 좀 남쪽으로 가보면 정주영의 꿈이 있다는 서산 간척지도 있습니다. 의외로 간척지는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역대 정권들은 그 정권의 색깔이나 성격과 무관하게 국토의 크기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새만금 이후로는 예전만큼 간척지를 팍팍 늘리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그만큼 이 새만금에 데인 것이 많았다는 이야기죠.

 

새만금의 시작은 1991년 물태우 정권 시절이지만, 사실 그 뿌리를 올라가면 썬글라스 박 시절까지 올라가는 꽤 장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1970년대 썬글라스 박 시절 군산 옥서 지역을 간척하는 계획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며, 그 이후에도 소규모 계획들이 안건으로 올라오다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그 시절에 전대머리 정권에서 김제와 부안에서 각자 진행하던 간척 계획을 군산 지역 간척 사업과 통합하여 지금의 새만금 개발 계획을 만듭니다. 물론 실제 삽을 뜬 것은 물통 시절이 열리고도 시간이 꽤 지나 전대머리가 백담사에 도피했다 돌아온 이후 일입니다만.

 

이 때까지만 해도 새만금을 비롯한 간척사업은 거의 대부분 '농지 확보'였습니다. 물론 공업용지나 주택용지 확보용 사업도 있었지만, 주된 목적은 농업용지였습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대한민국에서 식량, 특히 쌀 자급을 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통일벼 이야기를 적으면서 다뤘지만, 쌀이 아닌 잡곡이라도 일단 모자라서 보릿고개 운운하지 않게 된 것이 1970년대 중후반 이야기이며, 쌀까지 남아돌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중반까지 가야 합니다. 또한 어디까지나 추세가 이러했지 국제적인 식량 가격 폭등이나 흉년같은 이벤트가 가끔씩 벌어지며 식량 안보의 중요성이 계속 대두되었기에 썬글라스 낀 아저씨건, 대머리 살인마건, 대머리의 친구 물이건  농지 확보에 필사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시 한 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되짚어 보는 대한뉴스(3) - 정부미(통일벼), 그 불신의 역사

대한민국 역사, 아니 한반도 역사 전체에서 '쌀'을 넘치게 먹고 산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도 수 십년이 흘렀어도 쌀의 공급은 수요보다 모자랐습니다. 지금이야 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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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새만금은 기존의 다른 간척사업과는 규모의 차원이 달랐습니다. 일단 그 영역이 3개 시군에 이르는데다, 기껏해야 기존 갯벌이나 그 앞 바다를 조금 메우는 정도의 다른 사업과 달리 한참 먼 고군산군도 신시도까지 방조제를 쌓아서 거기에 쭉쭉 국토를 연장하겠다는, 흔히 말하는 '단군 이래 최초' 수준의 간척사업이었습니다. 일단 물부터 막아야 간척을 하니 방조제를 쌓아야 하는데, 그 방조제 공사도 물통도 가고 032가 등장하고 IMF를 만나 선생님과 노통장의 시대를 지나 가카의 치세가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또한 이 방조제 안에 십자 형태의 도로 구성은 503, 양산 책방 주인을 거쳐 윤근혜 각하 시대에 가서야 개통했으니 머나먼 일이죠.

 

이제 그러면 새만금 공사를 끝냈냐구요? 전혀 아닙니다.

 

현재 새만금 지역 지형도
새만금개발청의 개발 예정도

아직 예정했던 매립도 한참 멀었습니다. 일단 저기 있는 새만금신공항이라는걸 매립해서 만드는 게 빨라도 2030년, 방조제 바깥이라서 언제든지 하자면 할 수 있는 새만금신항만이라는 것도 지금 2040년에 만들 수 있을까 말까한 차원입니다. 나머지 땅이요? 언제나 될지 기약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땅을 매립해도 저 계획대로 땅이 쓰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긴 합니다.

 

새만금 이전 단계까지 가면 50여년 전, 첫 삽을 뜨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가도 한 세대인 30여년이 지났음에도 공사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며, 일단 알려진 최소한의 인프라만 해도 20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지경입니다. 국가 주요 사업이라는 것이 왜 이 꼴이 되었을까요? 여기에 새만금의 슬픈 상황이 있습니다. 더 이상 넓은 농지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위에 적었듯이 대한민국의 간척사업은 대부분 농지 확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장용지도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는 농지였죠. 새만금 사업 역시 국제 식량 가격이 뛰고 흉년을 맞이하고 하는 위기 상황에서 식량 증산을 위해 추진한 사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결정한 시기가 나무 나빴습니다. 비록 1987년에 흉년을 맞았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쌀 등 주곡 자급은 크게 문제가 없던 시절이고, 맛 없고 생산성만 좋은 통일벼는 몇 해 뒤인 1991년에 수매를 중단하면서 '양 보다 질'로의 전환 선언을 할 정도였습니다. 즉 더 이상 농지를 늘릴 필요성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인구는 계속 늘어나니 농지는 계속 필요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인구가 4,300여만명쯤 되었고, 지금은 5,100여만명이니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당시에는 지금 이렇게 아이들이 안 태어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쌀이나 보리, 콩 등을 안 먹는다는 점을 예상치 못한 것은 실수라 할 수 있습니다. 1991년에 비해 지금은 1인당 쌀, 보리, 콩 등의 소비량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대신 밀가루나 고기를 쳐묵(?)하는 것이죠. 새만금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러한 추세를 공무원들은 눈으로 보게 되었고, 나중에 사업이 끝나면 이 농토들을 어찌할꼬... 이런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러면서 새만금 사업은 김이 빠지고 추진 속도도 느려지고 맙니다. 남는 용지를 공장으로 쓴다... 이런 뻔한 아이디어도 나왔지만 공장을 아무나 짓고 아무나 필요로 하는게 아니니 이런 말은 하나 마나죠.

 

이렇게 사업 계획을 수정하며 속도도 느려진 상태로 대통령들은 계속 바뀌었고, 심지어 방조제를 완공한 가카 시절 이후에도 도대체 이 땅을 어찌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는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다 503 정권에서 이걸 다시 속도를 내겠다고 지금의 새만금개발청을 만들고 공항을 만든다, 항만을 만든다, 투자유치를 한다 등등 정책을 내놓았고, 이걸 서점 주인과 윤근혜 각하도 큰 틀에서는 손을 대지 않고 이어 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래저래 발버둥을 치기는 하는데 정확히 이 땅들을 어떻게 쓰겠으며, 실제로 그 목적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이 문제는 윤근혜 시대를 지나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건 계속 오랫동안 숙제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농지를 확보하겠다는 일념으로 단군 이래 최대의 간척사업을 벌였지만, 이후 인구 감소와 곡류 소비량 감소 상황에서 원래의 목적대로 쓰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남는 땅을 공업용지 등 다른 용도로 쓰려고 하지만 이 역시 인구 감소와 산업 구조의 변화로 여의치 않은 것이 현재의 새만금의 현실이며, 이는 수 십년 이상 전라북도, 아니 대한민국의 윗분들을 괴롭힐 문제로 남을 것입니다.

 

전라북도에서 뜨거운 바닷바람이 올라오는, 그것도 물 빠짐도 안 좋은 새만금 농토에 잼버리를 유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렇게라도 발버둥을 치지 않으면 새만금 사업은 앞으로 미래가 없이 지금 상태로 정체되고 말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발버둥이라도 제대로 쳤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준비가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어서 대한민국 역사에 남는 수치를 안긴 것은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