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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3) - 정부미(통일벼), 그 불신의 역사

dolf 2023. 8. 19. 02:00

대한민국 역사, 아니 한반도 역사 전체에서 '쌀'을 넘치게 먹고 산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도 수 십년이 흘렀어도 쌀의 공급은 수요보다 모자랐습니다. 지금이야 쌀이 넘쳐서 몇 년 분량이 쌓여 있어 문제고, 대한뉴스가 멀쩡했던 시절에도 언제는 쌀이 모자랐다 몇 년 뒤에는 남아 도니 제발 먹어라... 소리가 나오는 모순이 나오지만 이건 나중에 다시 다뤄보기로 하고... 하여간 나라의 높으신 분들은 국민들에게 쌀을 먹여 보겠다고 나름 노력은 했지만, 그 노력의 결과를 국민들이 전부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높으신 분들과 이 분들 시각에서는 백성이자 천민으로 비쳐지는 불쌍한(?) 일반 국민들의 관점 차이를 보여주는 '정부미', 정확히는 '통일벼'에 대해서 오늘은 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예. 1983년의 대한뉴스인데, 88 올림픽을 하기 5년 전인 1983년에도 쌀 부족과 쌀값 문제는 이슈가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쌀값이 올라도 그냥 물가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일반미'만 찾고 이건 모자라는데 '정부미'는 영 안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미 쳐먹어~'라고 합니다. 도대체 정부미가 무엇일까요? 사실 40~50대 이상은 들어봤을 단어입니다만, 그 이전 세대에게는 낯선 말일 수 있습니다.

■ 정부미, 그거 먹는 건가요?

정부미의 공식 명칭은 '정부양곡'이며, 지금은 '나라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부에서 직접 사들여 보관하고 유통하는 쌀을 말하는데, 정부양곡이라고 하면 쌀 이외에도 보리, 콩 등도 포함합니다. 정부미, 즉 나라미는 지금은 정부기관, 군부대 등 정부와 관련된 급식시설에 공급하며 그 이외에는 기초생활수급자를 비롯한 어려운 사람들, 재해 시 구호용으로만 한정하여 공급하기에 여기에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볼 일이 없죠. 굳이 관련이 있다면 '짬밥'이 정부미(현재 나라미)로 지은 밥이니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은 몇 년은 이 정부미 밥을 싫어도 꾸역꾸역 드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짬밥은 맛이 없죠.T_T

정부에서 양곡을 보관하는 것은 이러한 부분에서 안정적인 공급을 하는 것 이외에도 재해나 전쟁을 대비한 것이 더 큽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건 양곡을 정부 차원에서 어느 정도는 보관합니다. 물론 곡식을 수십년씩 보관할 수는 없으니 상태가 안 좋아질 때 쯤 어떻게든 소비를 시키는데, 이렇게 오래 묵은 쌀이 보통 정부미로 보급되어 '아~ 맛없어' 소리를 내게 만듭니다. 요즘은 정말 맛이 떨어진 것들은 가공용으로 전환하여 소비시키고 그나마 나은 것들로 정부기관이나 군, 교도소 등에 보급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뭐... 판단은 각자에 맡겨야죠.

지금은 정부미가 일반 소비자에게는 유통될 일이 없고 절대 금지 사항입니다만(윤근혜 각하께서 막으려 난리를 친 그 양곡관리법에 있는 일부 조항입니다. 정확히는 일반 판매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일반 판매를 위한 업자를 지정하지 않았고 이 지정 업자가 아니면 정부미 일반 판매가 불법이기에 사실상 일반 유통이 금지된 것입니다.), 저 시절에는 정부미 일반 판매를 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매수하여 정해진 판매 업자를 통하여 유통하는 '정부미'와 그냥 민간 업자들이 수매하여 가공 유통한 '일반미'가 따로 있었습니다. 쌀집에서도 이 두 가지를 따로 팔았습니다. 뭐 속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이건 여기서 다룰 이야기는 아니라...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 '정부미는 싸긴 싼데 맛이 없다'라는 점입니다. 정부에서 뒤에서 찔러 이런 광고까지 할 정도였죠. 일단 추억의 광고 하나를 더 보죠.

 

이렇게 TV 광고를 해가며 '정부미 쳐먹으란 말이다!!!' 할 정도로 정부미의 인식은 바닥을 쳤습니다. 실제 맛이 없었으니 저 소리가 나올 것인데, 위에 적은 정부미의 특성상 햅쌀이 나올 가능성은 낮고, 저 광고에 나온 바와 같이 도정비율이 낮고(이 말은 현미에 가까운 거친 맛이 남는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보다 과거는 더 보관 상태가 나빴을 것이니 밥맛이 떨어졌겠죠. 그렇지만 이만큼 정부미의 밥맛을 추락시킨 또 하나의 이유가 있으니 바로 '통일벼'가 정부미의 거의 대부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 통일벼, 그 영광과 굴욕의 역사

통일벼... 지금은 종자 보존은 하되 절대 보급은 안 한지 수 십년이 지난 품종입니다. 통일벼는 나름 높으신 분들(썬글라스 박 각하)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쌀을 먹여 보겠다고 노력한 결과물입니다. 원래 쌀이라는 물건은 많은 물과 높은 온도를 필요로 하는 작물입니다. 즉 고위도에 기온이 그리 높지 않은 한반도에서는 쌀농사가 쉽지 않습니다. 괜히 동남아가 쌀이 팡팡 나오는게 아닙니다. 더군다나 동북아시아에서 주로 먹는 쌀 품종인 자포니카는 중국 남부나 동남아권의 품종인 인디카보다 수확량도 영 시원찮으니 더욱 재배 면적 대비 생산량이 적습니다. 500년동안 나름 농업 발전이 있었음에도 조선이 개국할 당시에도 500~600만명, 구한말에도 1,500만명 전후가 될까 말까할 정도로 인구가 크게 늘지 못한게 이유가 있습니다. 괜히 멜서스 트랩이 아니죠.

하여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25로 나라가 작살나고 썬글라스 박 각하께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하는 난리법석에서도 쌀 자급은 먼 길이었습니다. 비료가 있어야죠. 그래서 열심히 비료공장을 지어서 비료를 퍼부어가며 농사를 지었는데... 그래도 모자랍니다.한반도의 위치와 자포니카 품종의 한계가 있는데 비료가 만능이 될 수는 없죠. 비료를 퍼부어 생산량을 늘려도 인구는 그 이상 늘어났으니까요. 그래서 1960년대까지는 보릿고개 걱정을 할 정도로 전체 곡식 공급이 부족해서 주기만 해도 감사할 지경이었습니다. 나라에서 혼식과 분식을 괜히 강요한게 아닙니다. 이왕 하나 더 대한뉴스 구경을 해보죠.
 

 

이제 1970년대가 옵니다. 비료만으로 쌀 생산을 늘릴 수 없게 되니 썬글라스 박 각하께서는 '동남아처럼 쌀이 팍팍 나오는 벼를 만들어!'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사실 그 전부터 볍씨 밀수도 해가며 외국 품종을 국내에 들여와 키워보려 했는데 잘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우리나라 사정에 맞는 벼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이에 당시 서울대 허문회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들이 연구를 하여 만든게 바로 통일벼입니다. 사실 이건 국제적으로도 꽤 이슈가 되었는데, 이는 자포니카 품종의 신품종이 아니라 당시 불가능이라 여겨졌던 자포니카와 인디카의 교잡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쌀에 있어 통일벼는 나름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 품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디카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 자포니카 품종보다 훨씬 생산량이 많았고, 생긴것도 일단 자포니카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이 결과에 만족한 정부에서는 억지를 써가며 전국에 통일벼를 도배하기 시작하여 1976년쯤 되면 쌀 자급 성공을 달성합니다. 50원짜리 동전에 들어간 그림이 이 통일벼입니다.(통일벼를 자랑하려 넣은건 아니고 당시 동전 가운데 하나에는 각국의 주식 작물을 넣으라는 FAO 권고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일벼가 그렇게 끝내줬으면 지금도 우리가 통일벼나 그 후계 품종을 먹고 있어야 할텐데 전혀 아니죠. 사실 통일벼는 생산량 많다는 그 하나 말고는 전부 단점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통일벼를 개발한 사람들도 다 아는 문제점이었는데, 썬글라스 박 각하가 언제 그런 문제점 생각하고 살았나요? 생산량이 끝내준다는 하나만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일단 그 문제점은...

- 맛이 없습니다. 당연히 자포니카와 인디카 교잡종이니까요. 사실 인디카 쌀이 무조건 맛이 없는건 아닙니다만, 밥을 짓는 방법 자체가 자포니카와 전혀 다르고 쌀의 특성도 다르죠. 인디카 쌀은 자포니카식으로 지으면 냄새나서 못 먹습니다. 인디카 특성이 맛에 남아 있으니 우리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고, 자포니카의 특성인 찰기도 떨어졌습니다. 이걸 개량한다고 저기 대한뉴스에도 나오는 밀양23호(이거 일반미 신품종이 아니라 통일벼 개량판입니다.)를 만들고 했는데, 그래봐야 맛 차이는 여전했습니다.

 

 

사실 1970년대 후반~80년 정도가 되면 최소한 '밥'의 퀄리티를 국민들이 어느 정도 따질 수 있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위의 대한뉴스를 보시면 1980년에 사람들이 쌀 노래만 부르고 보리 등 잡곡을 안 먹어서 '제발 잡곡 쳐먹어!!'라고 할 지경이 되었죠. 몇 년 전까지 보릿고개 노래를 부르던 것에서 그야말로 우디르급 태세 전환이지만, 그만큼 경제가 빠르게 발전했다는 의미겠죠. 보리도 잘 안 먹는데 '보리보다 맛 없어!' 악평을 듣던 통일벼가 인기가 있을 수 없죠.

- 냉해에 약합니다. 이 역시 인디카 특성 때문입니다. 자포니카도 냉해에 강한게 아닌데 동남아에서 온 특성이 더해지면 얼마나 심하겠는지요? 1980년에 그야말로 통일벼는 쪽박을 차는데, 이 냉해가 원인이었습니다. 전국을 강제로 통일벼 올인에 가깝게 만들었으니 그 데미지는 제대로 왔고, 1979년 대비 수확량이 30% 이상 줄었습니다.

- 만생종이라 이모작이 어렵습니다. 후딱 커서 빨리 수확하는 것을 조생종이라 하고 오래 키워야 수확할 수 있는 것을 만생종이라 하는데, 통일벼는 만생종이라 모내기부터 수확까지 걸리는 시간이 깁니다. 그러다보니 벼 수확 후 후딱 논을 갈아 엎고 보리를 심어 늦봄에 수확하는 이모작이 힘듭니다. 이는 농촌 경제에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닙니다. 지금이야 이모작을 해도 들어가는 돈에 비해 얻는 수익이 적어서 잘 안 하지만, 당시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 기타등등 잡문제들도 있습니다. 통일벼는 키가 낮은데, 키가 낮으면 비바람에 잘 안 쓰러진다 생각할 수 있지만(실제로 키가 큰 고시히카리가 비바람에 약한걸로 악명이 높습니다.), 키는 작은데 낮알이 엄청나게 달려 가분수 형태라 키가 낮아도 비바람에 약했습니다. 짚의 강도가 약하고 짧아서 당시로서는 농가 부수입이었던 새끼줄을 꼬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통일벼 보급 초기에는 병충해에 강한 듯 했지만, 1978년쯤에는 도열병이 제대로 돌아서 역시 쓴 맛을 제대로 봤습니다. 

이런 통일벼의 문제점은 당연히 실제 이 벼를 재배하는 농가에서도 바로 불만 사항으로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썬글라스 박 각하 치세의 군사 정권이 언제 국민 눈치를 크게 봤는지요? 그냥 억지로 밀어 붙였습니다. 특히 남부 지방, 즉 경상도나 전라도쪽은 그냥 통일벼 올인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 건국 이래 농업 정책이 농민의 뒤통수를 안 친 적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라 정부의 지도를 안 믿었는데, 인센티브와 협박을 섞어서 억지로 통일벼를 심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제대로 사고가 난 것이 1980년 냉해이며, 그래서 1981년에는 결국 통일벼 강제 보급을 포기합니다. 다행히 이후에는 당분간 풍년이 들어서 굳이 통일벼를 덜 심어도 쌀 부족은 생기지 않았고 오히려 쌀이 남아도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1991년에는 정부 수매조차 중단되며 통일벼는 이제 비상용을 대비한 육종시험장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실 통일벼가 남긴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쌀 하면 '경기미가 최고'라고들 많이 하는데, 사실 이게 이유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농사를 지은 쌀은 대부분 자가 소비를 했지만 상품으로 취급된 이후에는 시장 상황에 따라서 심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큰 시장인 서울(수도권)에 가까운 경기도 지역에서는 여유가 있는 이들 지역 소비자들이 돈내고 사먹을 수 있는 좀 더 좋은 품종을, 반대로 큰 시장에서 거리가 먼 충남이나 전라/경상도에서는 정부 수매나 농협 수매 등 대량 수매에 초점을 맞춘 맛은 없고 싸고 양 많은 품종을 길렀습니다. 통일벼로 전국을 통일할 당시에도 경기도 지역은 여전히 일반 벼 품종 재배가 적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남쪽에서는 '서울공화국을 운영하는 정부가 수도권만 편애하려 쌀도 이렇게 만들었다'는 불만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상대적으로 비싼 품종은 주로 경기도나 충북 등의 지역이 다수인게 사실입니다. 물론 2000년 이후로 쌀은 꾸준히 개량되고 있고, 지금은 전남이나 경남 등 쌀 대량 재배 지역에서도 정체불명 혼합미 이외에도 단일 품종으로 이름 걸고 나오는 쌀이 꽤 있으니 나름 골라 먹는 재미도 있습니다.


통일벼 자체는 어떻게든 쌀을 국민에게 먹이고자 했던 선한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실제로 쌀 자급자족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군사정권 특유의 강제성으로 제기된 여러 문제점들을 무시하고 전국을 통일벼로 도배시켜 농민들의 불만을 샀고, 결국 1980년의 냉해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밥 맛을 따지기 시작한 국민들에게도 통일벼,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인 정부미는 성에 차지 않았고, 품질 개선보다 단순 홍보만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나름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그 빛은 오래 가지 않은 셈입니다.

■ 대한뉴스에서 보는 오늘의 교훈

 

- 보릿고개와 쌀 자급 역사는 길지 않다. 일단 먹을 것을 최대한 남기지 말자.

 

- 전라도 쌀, 경상도 쌀이 맛 없고 경기미만 최고인건 아니다. 지역 특산미를 골라 먹는 재미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