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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 보는 대한뉴스(17) - 근본없는 정권의 근본없는 축제, 국풍81

dolf 2023. 12. 13. 09:37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한다'느니 '이기면 정의'라느니 정권만 손에 넣으면 당위성따윈 전혀 중요치 않다는 말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명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는 중요한 것이라서 쿠데타같은 정당성이 결여된 수단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라도 어떻게든 정권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정치적인 명분을 얻지 못했다면 최소한 국민의 마음이라도 현재의 정권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잡아야 합니다. 어떤 쿠데타 세력이라도 국민을 위해 뭔가를 하는 '척'은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기나긴 쿠데타 과정(12.12 쿠데타~5.17 쿠데타)을 거쳐 집권한 학살자 전대머리 정권에겐 당연히 정권의 정당성따윈 없었습니다. 저 쿠데타의 피날레로 광주에서 학살을 벌인 저딴 신군부에 그딴게 있을 수 없었으며, 아무리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여론 조작을 해대려 해도 학살이 숨겨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이렇게 정당성이 없는 정권들은 한 쪽으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고문하고 죽여대는 짓을 해대지만, 국민 대다수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만큼 겉으로는 어느 정도 풀어주는 척 하며 정치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일을 합니다. 괜히 전대머리 정권에서 3S(Screen, Sports, Sex) 정책을 시행한 것이 아닙니다. 방송에서는 땡전뉴스가 판쳤지만 다른 쪽에서는 프로야구 중계를 하면서 국민들이 전대머리의 만행에 관심을 덜 갖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지금은 나름 비웃음의 상징인 국풍81입니다.


 

 

국풍81은 전대머리 정권, 즉 5공화국을 다룰 때 나름 중요한 사건이지만 사실 여기에서 사람이 왕창 죽어나가거나 뭐가 박살나거나 한게 아니라서 관심도는 지금 기준에서는 많이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5공화국 시절 문화를 설명할 때 국풍81은 의외로 중요한 사항도 있습니다. 그건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 불순한 의도, 그리고 냉담한 대학생들

 

국풍81의 타이틀은 '전국 대학생 민속·국학 큰잔치'입니다. 즉 일단 표면적으로는 대학생 축제로 계획한 것입니다. 대학교 단위로 하는 축제나 연고전(고연전)같은 몇몇 학교가 연합해서 하는 행사가 아닌 전국의 대학생들의 연합 축제라는 타이틀을 걸었습니다. 다만 '민속'이라는 타이틀을 건 것이 좀 생소한데 이게 또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전대머리 정권의 괴벨스, 허문도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 국풍81의 기획자입니다. 허문도라는 사람은 전대머리의 사회/문화적인 부분에서의 브레인 역할을 한 인물인데, 땡전뉴스의 원인이 된 언론통폐합도 이 인간의 작품입니다. 하여간 이 인간이 전대머리 정권에 순응하지 않는 대학 사회를 보니... 당시 대학가에서는 민속 문화같은 전통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민속이라는 키워드는 근대화를 외치는 썬글라스박 정권, 그리고 이를 무단으로 승계(?)한 전대머리 정권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이라면 대학가의 탄압 차원에서 이러한 민속 문화를 어떻게든 때려 부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겠지만, 머리가 잘 도는 허문도는 정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민속 문화를 아예 관제 문화로 포섭하여 희석시키려 한 것입니다. 즉 민속문화의 어용화를 추구한 것입니다.

 

이 아이디어 자체는 허문도의 고유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조선일보 일본특파원 출신의 친일파인 허문도는 일본에서도 전공투 등 반 정권 성향을 보이는 대학생들을 포섭하고 대학생들의 반 정권적인 성향을 잠재우기 위해 가요제 등을 관제로 개최한 것을 벤치마크하였고, 마침 대한민국에서도 1970년대 후반부터 대학생 대상 가요제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이러한 대학생 대상 가요제의 연장 차원에서 행사를 기획한 것입니다. 시기도 절묘했는데, 이 행사가 열린 1981년 5월은 딱 광주에서 피를 흘린지 1년이 지난 때입니다. 즉 지금은 광주민주화항쟁으로 정당하게 평가받는, 당시는 광주사태로 폄하한 학살에 대한 대학생들 및 여기에 촉발한 국민들의 시위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 행사... 대학가에서는 당연히 속셈이 뻔히 보였기에 참여할 생각들이 없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전대머리 정권에서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목적이 실제 민속문화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들에게 그 끼를 보여주라는 것이 아니라 '민속문화는 저항문화, 대학생의 문제가 아닌 정부의 문화'로 포장하는 것이었으며 대학생들과 국민들이 1년 전 분 피바람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일 뿐이니까요. 최대한 대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긴 했으나 그래도 반응이 시원치 않자 군경에 입대한 대학생들을 현역 대학생들로 위장시켜 행사에 내보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대머리 정권은 정권에 순응하지 않는 대학생들을 강제로 군과 경찰로 입영시키는 일명 녹화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강제로 입대한 전 대학생들에게 선택지가 있을지요? 죽기 싫으면 까라면 까야죠. 국풍81의 핵심(?)인 전통문화 공연은 대부분 이렇게 동원된 군경들이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학가가 전부 한 몸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 사는 조직이 단 하나의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지는 않죠. 국풍81에 혐오의 시선을 보낸 것은 주로 '운동권'으로 분류되는 강성 세력이었고, 딱히 정치 운동에 관심이 없던 대학생들도 적지 않은 만큼 이들은 '일단 뭔가 축제의 판이 벌린다 하니 참여해볼까?'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들에 대해 대학가의 강성 주류들은 매우 고깝게 여겼고, '감히 전대머리의 행사에 참여해!'하며 국풍81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다른 학생들을 때려 잡았습니다. 국풍81에 함께 열린 대학생 가요제에서 우승한 서울대 밴드 갤럭시에 대해 서울대의 주류 운동권이 우승 기념 라이브에서 트집을 잡아 공연을 때려 부순 것은 나름 유명한 사건입니다.(사실 이는 그냥 어깃장은 아니었는데, 국풍81 전날에 전대머리 정권에 항의하여 투신한 학생도 나온데다, 국풍81 준비를 빌미로 서울대 학도호국단이 학내에서 깽판을 쳐 여론이 악화된 상태였기에 정권에 빌붙었다고 볼 수 있는 갤럭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이 행사에 강제로 끌려 나온 군경 출신 제대생들에 대해서도 그 사정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이들은 '배신자', '프락치' 소리를 들으며 매장당하고 맙니다. 당시 분위기상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돌대가리'적인 편향된 생각의 결과물이었다는 점 역시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 얼어붙은 세상, 즐길 거리를 만나 신난 시민들

 

이렇게 행사의 주체가 되어야 할 대학가에서는 전대머리의 의도에 대한 혐오감과 그래도 판을 깔아 준다는데 놀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뒤섞여 복잡했지만, 이 행사를 구경올 시민들은 전대머리의 의도가 어쨌거나 '아싸~ 놀 거리 생겼다~'며 기뻐했습니다. 아직 경제 발전이 아쉬운 시절이었기에 어디 먼 곳으로 놀러가기도 어려웠던 때, 서울 한복판에서 축제를 연다니 관심이 안 갈 시민은 없었습니다. 5일간 열린 이 축제에 관객만 600만명. 당시 서울 인구가 860여만명쯤 되었는데, 웬만하면 서울 시민들은 한 번쯤 와서 구경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유효했던 때였는데, 전대머리는 국풍81의 성공을 위해 이 기간동안 통행금지를 풀었습니다. 이 자유를 시민들은 더 만끽했고, 이 효과를 본 전대머리는 3S 정책의 연장선으로 다음해 초에 통행금지를 해제합니다.

 

또한 국풍81은 그냥 한 번만 열고 만 행사라고 하기에는 나름 문화적인 파급 효과도 있었습니다. 먼저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 이용의 등장입니다. 국풍81의 행사로 열린 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이용은 지명도를 크게 높여 한 때 조용필 선생님에 필적하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권에서 밀어준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필 메이저로 올라오게 된 기회가 정권이 기획한 행사였을 뿐 전대머리 정권에 영합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아서 한 때 받았던 '정권에 영합한 가수'라는 편견은 곧 사라졌습니다. 이용의 명곡 '잊혀진계절'은 10월 말, 특히 10월 31일 밤에는 꼭 들어야 하는 필수곡이 되었습니다. 다른 버전으로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국풍81에서는 사람만 뜬 것은 아니었습니다. 먹거리도 떴습니다. 축제가 열리면 당연히 노점이 인기인데, 정권 차원에서 기획한 대형 축제인 만큼 팔도의 먹거리가 여의도광장으로 모였습니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통해 지역의 소규모 먹거리가 전국으로 널리 알려지고, 자동차 보급도 잘 되어 있으니 먹으러 가는 사람도 많지만 이 때는 이런 기회가 아니면 지방 먹거리가 알려질 일이 없었습니다. 이 때 스타가 된 것이 막국수, 그리고 충무김밥입니다.

 

사실 막국수는 강원도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다양한 방식이 태어났지만, 춘천식이 막국수의 주류가 된 것이 바로 국풍81의 영향입니다. 그 이전까지 춘천 막국수는 춘천이나 주변 거주민이나 춘천에 업무차 오는 높으신 분들의 입을 통해서나 알려진 음식이었고 메이저는 아니었으나 국풍81에서 춘천식 막국수가 인기를 타면서 막국수라는 음식이 전국적인 음식이 되었고, 그 주류가 춘천식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사실 이 막국수도 다시 서울에서 개량되어 더 매워진 것이 현재의 스타일입니다만.

 

우리가 아는 충무김밥입니다. 당시 행사에서는 꼬치로 팔았다 합니다만.

 

또한 충무김밥이 지금과 같은 지명도를 갖게 된 것도 같은 이유인데, 충무김밥은 원래 통영(현재의 통영시는 통영군+충무시를 합친 도농복합시입니다.)의 선상식, 즉 도시락이자 패스트푸드였고 당연히 그 동네에서나 알음알음 먹던 것입니다. 이것이 국풍81을 계기로 서울로 올라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 김에 서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충무김밥은 일종의 분식집 메뉴나 고속도로 휴게소 메뉴에 가까워 도시락 느낌이며 일상적이라고 하기는 좀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남해안 가운데의 지역 음식이 어쨌거나 전국적인 분식/도시락 메뉴로 자리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국풍81은 전대머리 정권이 1년 전 광주에서 벌인 학살에서 국민들, 특히 대학생들의 눈을 돌릴 목적으로 기획한 어용 축제이며 그 흉계를 알고 있는 대학가에서는 대체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놀 거리에 목마른 국민들에게는 즐거움을 선사한 기회이기도 했으며 5일간의 짧은 축제에서 얻은 성과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축제를 연 성과(정권에 대한 불만 잠재우기)는 충분히 얻었기에 국풍 시리즈 축제는 더는 열리지 않았으며 그랬기에 국풍81은 더욱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비아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정당성을 갖지 못한 정권이 근본 없는 축제를 열었고 그래서 지금은 놀림감이 되었으나, 그 축제가 나름 성공한 바람에 여러 사회적인 바람을 불어 일으킨 것도 사실입니다. 국풍81은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하는 축제지만, 그 축제가 우연히 낳은 성과는 또 부정하기 어려운 이면이 자리합니다.